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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4034
성명
한자 金善亮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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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문화운동 포상년도 1990 훈격 애국장
1919 3.1운동시(運動時) 선천(宣川)에서 독립만세 시위(獨立萬歲示威)참여(參與)하였으며 1932. 3월 동우회(同友會)가입활동(加入活動)하다가 1940. 8.21 경성복심법원(京城覆審法院)에서 징역2년 집행유예(執行猶豫)3년형(年刑)을 받는등 8년에 걸쳐 활동(活動)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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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6권(1988년 발간)

황해도 안악(安岳) 사람이다. 1919년 3·1운동 때에 선천(宣川)의 신성학교(信聖學校) 3학년에 재학중이면서 민족대표 이승훈(李昇薰)의 지시를 받은 신성학교 성경교사 홍성익(洪盛益)·김지웅(金志雄)·양준명(梁濬明) 등의 지도하에 동교 기숙사 4층 지붕 밑에서 2·8독립선언서(당시 3·1독립선언서 미입수)를 등사하고 태극기와 「대호! 조선청년」이라 쓴 큰 깃발을 만드는데 참여하고, 1919년 3월 1일 신성학교의 종소리를 신호로 군청과 경찰서 앞을 지나면서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1932년 3월 장리욱(張利郁)·정인종(鄭仁宗)·김동원(金東元)·김성업(金性業) 등 기독교계 지도급 인사들과 함께 동우회(同友會, 수양동우회의 후신)에 가입하여 동기관지 『동광(東光)』을 발간하고 민족운동을 전개하다가 1937년 6월 6일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1939년 12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형을 받고 항소했으나, 1940년 8월 2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심대로 확정판결을 받았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인정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2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12권 501면
  • 安道山전서(朱耀翰) 185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8권 499·610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2권 1283·1328·1332·1384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245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권 443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9권 234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선량 - 황해도 안악(安岳) 3.1운동, 수양동우회 사건
본문
1899년 12월 28일 황해도 안악군(安岳郡) 읍내면(邑內面, 현 안악면) 훈련리(訓練里)에서 김용제(金庸濟)와 홍인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고향에서 안신소학교(安新小學校)를 졸업한 후 평안북도 선천(宣川)의 신성학교(信聖學校)에 진학하였다. 1919년 3월 1일 선천면에서 벌여진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 선천의 만세 시위는 민족대표이자 선천북교회 목사 양전백(梁甸伯)의 주도로 준비되었다. 신성학교 교사 김지웅(金志雄)·홍성익(洪成益)·정상인(鄭尙仁) 등을 도와 독립선언서를 등사하고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만세 시위 모의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 3월 1일 당일에는 시위에 가담하여 군청과 경찰서 앞 등 읍내 곳곳을 행진하며 만세를 불렀다. 1920년 3월 신성학교 졸업 후 중국으로 유학을 갔다. 상하이(上海) 프랑스 조계에 머무르던 중 안창호(安昌浩)를 만나 흥사단(興士團)에 가입하였다. 난징(南京)으로 떠나기 전까지 단원들과 함께 활동하였다. 1921년 3월 난징 금릉대학(金陵大學) 부속 중학에 입학하였다. 이즈음 유학 중에도 민족운동에 가담하여 난징 지역 불령선인으로 지목되어 일제 경찰의 주목을 받았다. 1922년 7월에는 화동한국학생연합회(華東韓國學生聯合會) 활동에 깊이 관여하였다. 화동한국학생연합회는 장쑤(江蘇), 저장(浙江), 안후이(安徽), 장시(江西) 등지에서 유학하는 한인 학생들의 연합 조직으로 학생간 연락, 친목 도모, 신착(新着) 학생 환영 등을 목적으로 하였다. 동해 7월 7일 여름방학을 기하여 상하이 인성학교(仁成學校) 내에서 유학생 40여 명이 모여 화동한국학생연합회 연합대회를 개최할 때 의사부(議事部) 의사장으로 선임되었다. 1923년 고향인 안악으로 돌아와 잡화점을 개설하고 과수원을 운영하였다. 1924년 봄 서울 이광수의 집에서 수양동맹회(修養同盟會)에 가입하였다. 1924년 『시대일보』 안악지국장을 맡고 있을 때 발행권 분규가 일어나자 지국장 대표로 대책회의에 참석하여 사태 해결에 힘을 보탰다. 이 사건은 보천교(普天敎) 측에서 『시대일보』를 기관지화하려고 신문의 편집 및 발행권을 보천교 측 인물로 명의변경하며 일어났다. 7월 중순에 개최된 『시대일보』 지분국장회의에 참석하여 『시대일보』 편집 및 발행권을 시대일보사로 인도하고 이후 경영을 시대일보사(사우회 및 지분국장회)로 인도할 것 등을 결의하였고, 교섭위원으로 선임되어 보천교 측과의 협상에 참여하였다. 안악기독청년회 창립에 관여하여 11월 30일 안악 읍내 예배당에서 열린 창립총회에서 회장으로 선임되었다. 같은 해에 김구(金九)의 모친 곽낙원(郭樂園)이 손자 김신(金信)을 데리고 귀국하자 안악으로 모시고 와서 보살폈다. 곽낙원이 다시 중국으로 떠나는 1934년까지 10년간 생계를 지원하였다. 1925년 5월에는 개벽사(開闢社) 안악분사 지사장을 맡았다. 1926년 수양동맹회가 동우구락부(同友俱樂部)와 합하여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로 개칭되고 5월부터 기관지 『동광(東光)』을 발간하기로 하자 발행자금으로 100원을 제공하였다. 1928년 12월부터 이듬해에 걸쳐 서울에서 이광수(李光洙)·주요한(朱耀翰) 등과 수양동우회의 약법 개정을 논의하였다. 단체의 세력 확장을 위해 약법에 정치 투쟁을 가미하자는 주장에 반대하여 일제 당국의 탄압을 받을 우려가 있으므로 정치 투쟁 가미를 가급적 피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1931년 2월 22일 서울 동광사(東光社)에서 이광수·박현환(朴賢煥)·김윤경(金允經)·주요한·김동원(金東元) 등과 만나 동우회 진흥책을 협의하였다. 이 회합에서 동우회 주최 하계수양회를 열어 주의와 강령을 선전하고, 장래의 혁명 동원을 준비하기 위하여 청년개척군(靑年開拓軍)을 조직할 것 등이 논의되었다. 같은 해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2년 과정을 수료하였다. 1934년 1월 2일 서울 태서관(太西館)에서 이광수·이용설(李容卨)·김동원·이영학(李英學)·장리욱(張利郁) 등과 만나 동우회 회원 증가, 회관 신축, 동맹 저축 실시 등 진흥책을 협의하였다. 1936년 5월 안악군 유지 50명이 안신보통학교에 모여 조직한 안악고등보통학교설립운동발기회(安岳高等普通學校設立運動發起會)의 발기위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기본금 부원에 선임되었는데, 집안인 김씨 문중의 김용정(金庸鼎)·김용진(金庸震)·김홍량(金鴻亮) 등이 30만 원을 희사하였다. 1937년 5월에 발생한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주요 관련자들이 연이어 체포되었다. 이 사건에 연루되어 1937년 11월 23일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었다. 1938년 3월 22일에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되었고 같은 해 7월 28일 보석으로 출감하였다. 1939년 12월 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에 대하여 무죄 판결을 받았으나 검사가 항소하였다. 1940년 8월 2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82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도움말
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치안유지법위반 징역 2년 원심미결구류일수 중 60일 본형에 산입 집행유예 3년 경성복심법원형사제2부 1930-08-21 국가기록원
2 인물카드 치안유지법위반 - 경성지방법원 - 국사편찬위원회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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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대전현충원 대전광역시 유성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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