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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2월 16일 경상남도 통영군(統營郡) 원량면(遠梁面) 서산리(西山里)에서 태어났다. 금산춘남(金山春男)이라는 창씨명이 있다.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1939년 3월 취업을 목적으로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 교토부(京都府) 쓰즈키군(綴喜郡) 다나베쵸(田辺町) 시마무라(島村) 토목 건설 현장에서 노동업에 종사하였다. 일본인의 한국인에 대한 차별 대우와 열악한 노동환경, 한국 노래조차 마음대로 부를 수 없는 현실을 경험하면서 민족이 처한 현실에 눈뜨게 되었다.
1941년 9월, 직장 동료 전경원(全京元, 玉城信正)으로부터 한국인이 차별받지 않고 진정한 행복을 얻으려면 광복 외에는 방법이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에 호응하였다. 같은 시기 김말도(金末度)·이상문(李相文, 山本相文)·윤성택(尹成澤, 伊藤政雄) 등 토공노동자들도 동지가 되어 정기적으로 회합하였다. 일제는 이를 ‘재교토조선인토공민족주의 그룹(在京都朝鮮人土工民族主義グループ)’이라 불렀다.
비밀 모임 결성 이래 1944년 6월까지 3년여 동안 활동을 전개하였다. 모임을 통해 아시아태평양전쟁의 추이, 식민지 한국에서의 한국인의 비참한 실상 등의 정보를 교류하고, 일제의 식민통치를 비판하였다. 한편으로는 일제 패망이 가까워졌음을 확신하고, 미국과 중국의 대(對)일본 전쟁을 원조해서 한국을 독립시키기 위한 활동 방침을 논의하였다.
1942년 여름, 모임을 갖고 한국 내 순사 모집에 한국인이 제외되고 있는 실상을 논의한 뒤 ‘내선일체(內鮮一體)’정책의 허상을 비판하였다. 그리고 경찰 시험에 응모해 장차 자신들이 경찰관이 된다면, 직무를 수행하며 다수의 한국 청년을 규합해 대대적으로 독립운동을 일으킬 것을 결의하였다.
1943년 1월 모임에서는 아시아태평양전쟁의 추이로 보아 일본이 곧 패망할 것이므로, 한국 독립의 실현을 위해 적당한 시기에 무력으로써 ‘내란(內亂)’을 일으킬 것과 실현을 위해 노력할 것을 다짐하였다. 동년 5월에는 잠시 한국으로 귀국했다 돌아와 한국의 사정과 ‘내지(內地)’의 식량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전했고, 동지들이 민족 독립의 당위성을 앙양(昂揚)하는 데 일조하였다.
1944년 한국인에 대한 일제의 징병제 실시로 자신들의 입대가 가까워지자, 입대 후의 독립운동 계획을 수립하였다. 입대하면 각자 배속된 병영 내 한국인 후배들을 계몽시켜 독립의식을 고취하고, 나아가 자신들이 최전선에 포진하게 되면, 적당한 기회를 노려 ‘적(敵)’에게 투항 또는 통모(通謀)하여 일본을 패망으로 이끄는 ‘이적행위’를 하기로 하였다. 가능한 한 항공병과에 지원해 전투기로 일본 본토 폭격을 감행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러나 1944년 6월 일제 경찰의 노동현장 일제단속 중 활동 내용 일부를 담은 전경원의 일기장이 발각됨으로써 관련자들에 대한 일제의 대대적인 체포가 시행되었다. 6월 14일 체포되었고, 11월 10일 교토지방재판소 검사국으로 송국되었다. 이후 극심한 고문을 동반한 장기간의 예심을 거쳐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 형을 선고받았으며, 1945년 9월 출옥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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