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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3758
성명
한자 朴玄東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의병 포상년도 1990 훈격 애족장
1906년 4월 최익현 휘하 의병(崔益鉉麾下義兵)에 가담하여 의병 200여명을 공주(公州)에서 초모(招募)하고 광주(光州) 일군(日軍) 수비대(守備隊)를 습격코져 진군하다가 전북(全北) 임실(任實)에서 의병 80명을 증모(增募)하여 순창읍(淳昌邑) 부근에서 일 수비대(日守備隊)와 접전하여 패퇴(敗退)하였으나 그 후 일자미상(日字未詳) 체포(逮捕)되어 1910. 3. 2 광주지방재판소(光州地方裁判所) 전주지부(全州支部)에서 유형(流刑) 5년형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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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권(1986년 발간)

전라남도 광주군 와곡면(光州郡 瓦谷面)에 거주하던 사람으로 공주·순창 등지에서 후기 의병운동을 전개한 인물이다.

1906년 4월 면암 최익현(勉菴 崔益鉉)이 국운이 날로 기울어 을사조약이 강제로 늑결되게 되자 "근고팔도민서(謹告八道民書)"라는 격문을 각지로 띄웠다.

박현동은 그 격문을 보고 면암 의진에 가담할 것을 결의하고, 그에 호응하기 위하여 의병 200여 명과 총 20∼30정으로 무장하고 광주 수비대를 공격할 목적으로 공주(公州)를 떠났다.

다시 전북 임실(任實)에서 의병 80여명과 총 50 정을 추가하고 면암의 근거지인 순창(淳昌)으로 들어가 주둔하였다.

4월 7일부터 8일 사이에 광주·전주·공주 등지로부터 면암 의진을 저지하기 위해 집결한 진위대와 수비대를 상대로 순창 읍내에서 교전하였으나, 의진의 형세가 정비되기 전이었으므로 패퇴하고 말았다.

그러한 일련의 의병활동이 적에게 발각되어 1910년 3월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유형(流刑) 5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경술국치로 일제의 밀계가 이루어지자 석방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1권 835면

수형기록

도움말
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내란 징역 5년 광주지방재판소전주지부 1910-03-02 국가기록원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소재지
국내산재 광주광역시 광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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