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권(1986년 발간)
경상북도 영일(迎日) 출신으로 정환직(鄭煥直)의 재종질(再從姪)이다.
1905년 일제의 책략에 의해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고종은 측근에 있던 동엄(東嚴) 정환직에게 의병 거사할 것을 종용하였다. 고종의 밀지를 받은 정환직은 아들 정용기(鄭鏞基)에게 고향 영천(永川)으로 내려가서 거사할 것을 명하였으며 중앙에서의 지원도 약속하였다.
고향에 내려온 정용기는 정진한·이한구(李韓久)·손영각(孫永珏) 등과 거사계획을 세워 정진한은 이한구·손영각과 함께 본부를 지키는 한편 이규필(李圭弼)·백남신(白南信)·정완성(鄭完成)·최기보(崔基輔)·최치환(崔致煥)·정진학(鄭鎭鶴)·정대하(丁大廈)·이창송(李蒼松) 등을 각 지방으로 파견하여 조직확대를 꾀하였다.
그리하여 산남창의진(山南倡義陣)이 형성되어 대장으로 정용기가 추대되고, 정진한은 소모장에 임명되었다.
산남의진 초기에 정진한은 의병소모와 군수품 수집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06년 4월 28일 청하읍으로 진격하던 길에 경주 진위대 참령 신석호(申錫鎬)의 간계에 빠져서 체포되어 대구로 압송되었다.
이때 정진한은 옥중의 정용기와 만나 옥중 동정을 탐지하여 진중에 알리는 역할을 하였다.
9월 정환직의 주선으로 정용기가 석방되었으나 여전히 감시하에 있었으므로 산남의진의 활동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주요간부들의 끊임없는 노력으로 1907년 4월부터 산남의진의 제거를 꾀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1907년 8월 정진한은 자양(紫陽)에 침입한 왜적을 격파시키고 청하(淸河)·흥해(興海)·군의(軍義) 등의 왜적을 격파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1907년 9월 의병장 정용기가 순국하는 변을 당하였으나 다시 정환직을 의병장으로 추대하여 청하(淸河)·영양(英陽)·영해(寧海)·일월산(日月山) 등지에서 일군과 교전하였다.
11월에 정환직마저 체포되어 순국한 후에는 최세한(崔世翰)·이세기(李世紀) 등과 함께 항일투쟁을 전개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그후 접전 중에 적에게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나 1910년 경술국치 때 특사를 받아 석방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2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산남창의지 32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권 350·352·387면
- 산남의진유사 5권 343∼34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