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4권(2019년 발간)
광주에서의 3.1만세운동은 김복현(金福鉉)이 「독립선언서」 수천 매를 가져오면서 시작되었다. 3월 6일 광주에 온 김복현은 김강(金剛)·송흥진(宋興眞)·서정희(徐廷禧)와 숭일학교(崇一學校) 교사 최병준(崔丙俊)과 상의하여 3월 10일 광주 큰 시장에 모여 김복현이 「독립선언서」의 취지를 연설한 후에 ‘독립만세’를 부르기로 하였다.
일반시민 동원은 서정희가 맡고, 숭일학교 학생 동원은 최병준이, 수피아여학교 학생동원은 교사인 박애순·홍승애가 맡았다. 3월 10일 오후 2시경 김복현·김강·서정희 등의 선언서 배포를 시작으로 부동교 아래 작은 장터에서 1,0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시위대는 각 방향에서 조직적으로 만세시위를 진행하였다. 양림동 쪽에서는 수피아여학교 학생들인 홍승애 등이 시위대의 앞에서 광주천을 따라 행진을 하였다. 시위대가 우편국 앞으로 행진을 계속하자, 일제 기마 헌병대와 소방대·재향군인회 소속 회원들까지 가세하여 강제진압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만세시위 주도자와 시위 군중 100여 명이 붙잡히자 시위대는 해산하였다.
홍승애는 이 날의 만세시위로 체포되었다. 1919년 4월 30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保安法) 위반’으로 기소되었으나 무죄 방면되었다. 검사가 공소를 제기했으나, 1919년 8월 1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치안 방해의 공소사실에 대해 살펴봄에 그것을 인정할만한 범죄 증빙이 충분하지 않다”하였다. 5개월여 옥살이를 하다가 석방되었다.
정부는 2018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판결문(判決文)(광주지방법원:1919. 4. 30)
- 판결문(대구복심법원:1919. 8. 13)
- 한국독립운동의 역사(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2009) 제20권 185~187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