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5권(2003년 발간)
전남 광주(光州) 사람이다.
1919년 3월 10일 광주군(光州郡) 광주시내(光州市內)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이곳의 만세운동은 국장(國葬)에 참여하기 위해 서울에 올라갔던 김철(金鐵)과 서울 유학생 최정두(崔正斗) 등이 3월 5일 광주로 돌아옴에 따라 시위운동에 대한 계획과 준비가 진행되었다.
이에 최영균은 숭일학교(崇一學校) 교사 김강(金剛)을 비롯한 황상호(黃尙鎬)·홍승애(洪承愛) 등과 함께 3월 8일 광주 장날에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하고, 각각 그 준비를 분담하였다.
그래서 최영균은 학생 동원을 책임지고, 독립선언서와 태극기 준비는 최한영(崔漢泳)이 분담하였으며, 일반시민동원은 서정희(徐廷禧)가 맡았다. 또 수피아(須彼亞)여학교와 영락학교 학생 동원은 홍승애가 맡았다.
그러나 시위 준비와 연락이 부족하여 날짜와 장소를 연기하여 3월 10일 장날 오후 3시 반에 거사하기로 하였다. 드디어 3월 10일 오후 3시경 부동교(不動橋) 아래 장터에 1천여 명의 군중이 모였고, 수피아 여학교 학생들은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배포하였다. 그리고 최영균을 비롯한 주동자들은 대형 태극기를 앞세우고 시위군중을 인도하면서 대한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최영균을 비롯한 주동자들은 군중들을 이끌고 경찰서 앞마당으로 행진하였다. 그러나 일본 경찰과 기마 헌병들은 무력으로 시위대를 해산시키고, 주동자들을 연행하였다.
최영균은 이 일로 붙잡혀 1919년 8월 1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3卷 555∼559面
- 判決文(光州地方法院, 1919. 4. 30)
- 判決文(大邱覆審法院, 1919. 8.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