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6권(1988년 발간)
평안남도 대동(大同) 사람이다.
1920년부터 시작된 조선물산장려운동(朝鮮物産奬勵運動)에 적극 협조하여 평양시민 궐기대회를 소집하여 이를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데 기여하였다. 1922년 7월에는 평양의 동아일보 평양지국에서 조명식(趙明植)·김병연(金炳淵) 등과 동우구락부(同友俱樂部)라는 단체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이 단체는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가 조직될 때까지 활동을 계속하였다.
1926년 4월 수양동우회 간부회의에 참석한 그는 조병옥(趙炳玉)·이윤재(李允宰)·정인과(鄭仁果) 등과 함께 서울에서 기관지 동광(東光)을 발행하기로 결정하고, 동년 5월부터 이를 발간하여 민족정신을 고취하였다.
1928년 7월에는 평양과 안악(安岳)에 동 지부를 설치하였으며, 수양동우회 약법(約法) 초안을 작성하여 상해의 안창호(安昌浩)와 협의 확정하기도 하였다.
1930년 1월 민족진영과 사회주의계열이 합의하여 민족운동의 구심체로서 신간회(新幹會)를 결성하자 조만식(曺晩植)과 함께 평양지회를 조직하였으며 그는 서기장(書記長)에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한편 수양동우회 활동에도 적극 참가하여 백영엽(白永燁)·김항복(金恒福) 등 동지들을 다수 가입시켜 동우회 운동의 활성화를 기하였으며, 1934년 7월에는 소년척후대(少年斥候隊) 조직에 관여하여, 평양연맹 부이사장(副理事長)에 임명되어 활동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각 방면으로 독립운동을 위해서 활동하던 그는 1937년 6월 동우회 운동으로 동지들과 함께 일경에 붙잡혀 1940년 8월 2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형을 받았으며 고등법원에 상고하여 1941년 11월 17일 무죄판결을 받아 석방되었으나 고문과 옥고의 여독으로 불구가 되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0권 676·698·699·770·1059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4권 329·613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245면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12권 501·827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311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분책 335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8권 499·609·610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2권 1283·1285·1288·1292·1304·1308·1310·1320·1324·1328·1330·1335·1341·1366·1418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