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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金性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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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
운동계열 문화운동 포상년도 1990 훈격 애국장
1920 조선물산장려회(朝鮮物産獎勵運動)을 주도하며 신간회 재정비 사업(新幹會再整備事業)흥사단동우회(興士團同友會)운동으로 피체(被逮)된 바 있으며 출감후에는 소년척후대 조직(少年斥候隊組織)하는 등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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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6권(1988년 발간)

평안남도 대동(大同) 사람이다.

1920년부터 시작된 조선물산장려운동(朝鮮物産奬勵運動)에 적극 협조하여 평양시민 궐기대회를 소집하여 이를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데 기여하였다. 1922년 7월에는 평양의 동아일보 평양지국에서 조명식(趙明植)·김병연(金炳淵) 등과 동우구락부(同友俱樂部)라는 단체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이 단체는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가 조직될 때까지 활동을 계속하였다.

1926년 4월 수양동우회 간부회의에 참석한 그는 조병옥(趙炳玉)·이윤재(李允宰)·정인과(鄭仁果) 등과 함께 서울에서 기관지 동광(東光)을 발행하기로 결정하고, 동년 5월부터 이를 발간하여 민족정신을 고취하였다.

1928년 7월에는 평양과 안악(安岳)에 동 지부를 설치하였으며, 수양동우회 약법(約法) 초안을 작성하여 상해의 안창호(安昌浩)와 협의 확정하기도 하였다.

1930년 1월 민족진영과 사회주의계열이 합의하여 민족운동의 구심체로서 신간회(新幹會)를 결성하자 조만식(曺晩植)과 함께 평양지회를 조직하였으며 그는 서기장(書記長)에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한편 수양동우회 활동에도 적극 참가하여 백영엽(白永燁)·김항복(金恒福) 등 동지들을 다수 가입시켜 동우회 운동의 활성화를 기하였으며, 1934년 7월에는 소년척후대(少年斥候隊) 조직에 관여하여, 평양연맹 부이사장(副理事長)에 임명되어 활동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각 방면으로 독립운동을 위해서 활동하던 그는 1937년 6월 동우회 운동으로 동지들과 함께 일경에 붙잡혀 1940년 8월 2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형을 받았으며 고등법원에 상고하여 1941년 11월 17일 무죄판결을 받아 석방되었으나 고문과 옥고의 여독으로 불구가 되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0권 676·698·699·770·1059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4권 329·613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245면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12권 501·827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311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분책 335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8권 499·609·610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2권 1283·1285·1288·1292·1304·1308·1310·1320·1324·1328·1330·1335·1341·1366·1418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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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성업 호 : 일석(一石) 평안남도 대동(大同) 물산장려운동, 수양동우회사건
본문
1886년 2월 1일 평안남도 대동군(大同郡) 부산면(斧山面) 대양리(大陽里)에서 태어났다. 호는 일석(一石)이다. 아내 박현숙(朴賢淑)은 일찍이 3·1운동에 참여하였고 임시정부의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겪은 경험이 있으며,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제2대 무임소 장관 및 국회의원을 지냈다. 평양의 대성학교(大成學校)에 다닐 때 안창호(安昌浩)의 감화를 받아 민족의식을 갖게 되었다. 1912년 봄 대성학교를 졸업한 후 보성전문학교에 진학하여 2년간 다닌 후 학업을 그만 두었다. 1913년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 직원이 되었으나 1916년 6월 그만두었고, 곧이어 안창호가 설립한 평양 마산동자기회사(馬山洞磁器會社)의 지배인으로 1918년까지 근무하였다. 1920년 6월 25일 평양청년회관에서 개최된 대성학우친목회에서 임시회장으로 활약하였고, 이날 친목회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20년 초부터 조만식(曺晩植)이 중심이 되어 평양에서 시작된 경제 자립 운동인 물산장려운동에도 참여하였다. 1920년 8월 평양에서 개최된 조선물산장려회(朝鮮物産獎勵會) 창립총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물산장려운동은 한동안 부진을 면치 못하다가 1922년 들어 출자금을 확보하여 마침내 6월 25일 평양 대성관에서 창립총회를 개최하였다. 조만식이 회장으로 선출되었고 이때 김동원(金東元) 등과 함께 이사로 선임되었다. 1922년 7월 중순경에는 동아일보 평양지국에서 김동원·조명식(趙明植)·김형식(金瀅植) 등과 함께 동우구락부(同友俱樂部)를 조직하였다. 참여자들은 안창호와 가까운 사람들이었다. 단체의 성격은 흥사단(興士團)과 유사하여 대외적으로 친목 단체임을 표방하였으나 실질적으로는 인격 수양을 중심으로 실력양성론을 지향하는 정치 단체였다. 1924년 5월에는 동아일보 평양지국장이 되었다. 본사가 평양지국을 직영한 1928년 상반기를 제외하고 1937년까지 계속 지국장을 맡았다. 1924년 서북 지역에 기근이 발생하자 11월 21일 평양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열린 평양기근구제회 집행위원회에 참석하여 구제금 모금 및 당국과의 교섭 방법 등을 논의하였고, 구제 업무를 실행할 상무위원 중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다. 1925년에는 서울 및 남한 지역에 큰 수해가 발생하자 이를 돕고자 7월 27일 평양수재구제회를 조직하고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5년 11월에는 수양동맹회(修養同盟會)에 가입하였다. 수양동맹회는 1922년 2월 서울에서 이광수(李光洙) 등이 조직한 흥사단 계열의 수양 단체로 동우구락부와 성격과 활동이 유사하였다. 1926년 1월 수양동맹회와 동우구락부가 합동하여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로 개편되자 이에 참가하였다. 1926년 4월경 이광수·조병옥·정인과·김동원·유상규 등과 함께 수양동우회의 주의와 강령을 국내외에 선전하고 조직의 확대 강화를 도모하려고 기관지 『동광(東光)』을 월간으로 발행할 것을 협의하였다. 그 결과 그해 5월 『동광』 창간호를 발간하였다. 1927년 2월 민족협동전선의 일환으로 신간회(新幹會)가 창립되자 평양지회 설립을 위한 활동을 벌였다. 같은 해 12월 20일 개최된 창립총회에서 준비위원으로서 그간의 지회 설립 경과를 보고하였다. 이듬해 1월 10일 열린 신간회 평양지회 제2회 간사회에서 서울에서 개최될 신간회 대회에 파견할 대표회원 중 한 사람으로 선임되었다. 한편 1927년 12월부터 수양동우회 회원들과 약법 개정에 대한 여러 차례 논의한 후 상하이(上海)의 안창호와도 협의를 하여 대공주의(大公主義)를 가미한 약법 초안을 마련하였다. 1928년 7월 7일 개최된 회합에서 개정약법의 공포는 일시 보류된 대신 평양·선천·안악 등에 수양동우회의 지부를 설치하기로 하였다. 1930년 11월 1일 김동원·조명식 등과 회합한 자리에서 김동원이 정간 중인 수양동우회 기관지 『동광』을 속간하여 동우회의 주의 주장을 내외에 선전할 필요가 있으므로 각 지부에서 6,000원을 분담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자 이에 찬성을 표하였다. 1932년 1월 12일 조선물산장려회는 창립 10주기 기념으로 조선물산전시회를 5월에 평양에서 개최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날 회의에서 연구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33년 2월 1일 김동원, 조명식 등과 회합하여 동우회의 확대 강화를 위하여 수양동우회 평양지방회관 설치를 협의하였다. 1934년 7월 21일 대성학우회관에서 개최된 소년척후대(少年斥候隊) 평남연맹 정기총회에서 부이사장으로 선임되었다. 1935년 2월 수양동우회 평양지방회관에서 열린 동우회 모임에 참여하여 동맹저금 실시 문제를 협의하였고, 1936년 9월 수양동우회 모임에서는 안창호가 주장한 자아혁신 운동에 대하여 경청하는 등 수양동우회 활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1937년 6월 12일 수양동우회 활동이 치안유지법 위반이라는 이유로 경찰에 체포되었다. 같은 해 11월 1일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옥고를 겪다가 1938년 7월 28일 보석으로 출감하였다. 1939년 12월 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자, 원심검사가 항소하여 1940년 8월 2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 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상고를 제기하여 1941년 11월 17일 고등법원에서 증거불충분으로 무죄 판결을 받았다. 1937년 체포된 이후 종로경찰서에서의 심한 고문을 당하여 건강을 해쳤고 그 상태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보석 때까지 옥고를 겪었다. 이 때문에 척추신경 마비 및 언어장애 등 불구가 되어 투병생활을 하다가 1965년 1월 19일 서울에서 사망하였다. 1990년 12월 6일 국립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부인 박현숙과 함께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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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판결문 치안유지법위반 징역 3년 원심미결구류일수 중 190일 본형에 산입 경성복심법원형사제2부 1940-08-21 국가기록원
2 판결문 치안유지법위반 사실 심리를 함 고등법원 1941-07-21 국가기록원
3 인물카드 치안유지법위반 - - -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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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묘지 대전현충원 대전광역시 유성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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