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1927년 2월
3. 1929년
4. 1935년 여름
5. 1937년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5권(1988년 발간)
평안남도 안주(安州) 사람이다.
중국으로 망명, 황포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 무한분교(武漢分校)에 입학, 훈련을 받았으며, 1924년 9월 박은식의 양자인 동교생 박시창(朴始昌) 송욱동(宋旭東) 등 수명 및 중국군대의 기술교관으로 있는 백득림(白得林) 등과 같이 무창(武昌)에서 무한한인혁명청년회(武漢韓人革命靑年會)를 조직하여 동지 훈련과 광복운동 선전에 심신을 경주하였다.
1927년 2월 그는 유자명(柳子明) 신공제(辛公濟) 김규식(金奎植) 등과 손잡고 중국인, 안남인, 인도인 등과 남경에서 연합하여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東方被壓迫民族聯合會)를 조직하고 김규식을 동회의 회장으로 추대하였다. 여기서 그는 한국부 상무(韓國部常務)로 활약하다가 기관지 「동방민족(東方民族)」을 한 중 영문(韓中英文)으로 발간하여 민족독립의 당위성 절박성을 호소하였다.
1929년에는 남경에서 민병길(閔丙吉) 신익희(申翼熙) 김홍일(金弘壹) 등 10여 명과 한국혁명당(韓國革命黨)을 조직, 활동하였다. 이어 그는 무력행동단체로 철혈단(鐵血團)을 조직하고 그 단장이 되었으며, 나월환(羅月煥) 등 10여 명을 중견 단원으로 하고 기관지 「우리길」을 발간,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1933년 남경(南京)에서 김규식이 김두봉 신익희 최동오 등과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韓國對日戰線統一同盟)을 결성할 때 그는 남경한교회 간부로 참여하였다. 이듬해에는 남경한교회 주석으로 의열단 활동에도 참여했으며, 1935년에는 낙양군관학교를 졸업하고 군 간부양성에 치중하며 한국 역사를 가르쳤다.
1935년 여름 5당(한국독립당 신한독립당 조선혁명당 의열단 미주대한인독립당) 대표가 남경에서 회합하여 통합당으로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을 조직할 때 그는 실무간부로 활약하였으며 기관지 「민족혁명」을 발간하였다.
1937년 그는 민족혁명당 상해특별지부장이 되어 김원봉 등 적색분자를 제거하는 청당운동에 참여하는 등 활약하다가 동 10월에 중일전쟁의 발발과 동시에 적극적 지도 임무를 띠고 군자금 모집, 밀정처단 등 후방교란에 활약하다가 동 12월 하순 상해 일본영사관에 체포되었다.
그는 평양으로 압송되어 옥고를 치렀다고 하며, 출옥 후 다시 상해로 탈출하여 1943년 3월 15일 현재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비서처의 부비서장에 임명되어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사상정세시찰보고집 243면
- 사상정세시찰보고집(기2) 22·454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361·362·363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2권 598·602·608·611·614면
- 한국민족운동사료(중국편)(국회도서관) 827·828·870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3권 522면
- 국외용의조선인명부(총독부경무국) 4·6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84면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13권 608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4권 74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