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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30790
성명
한자 金永鍾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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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1999 훈격 애족장
1919. 4. 3 경남(慶南) 창원군(昌原郡) 진전면(鎭田面)에서 약 1500여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진동(鎭東)헌병주재소를 습격하고 주재소 경계원과 보조원을 응징하는 등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다가 피체(被逮)되어 징역 1년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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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4권(2000년 발간)

경남 창원(昌原) 사람이다.

1919년 4월 3일 경남 창원군 진전면(鎭田面)·진북면(鎭北面)·진동면(鎭東面)의 연합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3월 28일 진동면 고현리(高縣里) 장날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후, 피신했던 변상태(卞相泰)·권령대(權寧大)·권태용(權泰容) 등에 의해 계획되었다.

이때 김영종은 이들의 계획을 접하게 되자, 이에 적극 찬동하고 변상섭(卞相攝)·황태익(黃泰益) 등과 연락을 취하며, 4월 3일 인근의 3개 면민들을 동원하여 진전면 양촌리(良村里)의 냇가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4월 1일 변상태·황태익 등은 변우범의 집에 모여 회의를 한 후, 동리 서당에서 태극기를 제작하여 미리 동리 사람들에게 배포해 주고, 인근지역을 순회하며 민들의 궐기를 호소하였다. 또한 그들은 4월 2일 정오쯤, 진전면 양촌리 토지개간장에서 약 7∼8명의 군중에게 독립운동에 참가하지 않는 자는 조선 사람이 아니고 금수와 같아 후환이 있을 것이라는 경고도 하였다.

4월 3일 오전 9시, 수천 여명의 시위군중이 양촌리 냇가에 집결하였다. 변상섭의 독립선언서 낭독에 이어 변상태가 독립만세를 선창하자 양촌리 계곡은 온통 태극기의 물결 속에 독립만세의 소리로 진동하였다. 그리고 시위군중이 독립만세를 외치며 진동면의 헌병주재소로 몰려갔다. 김영종은 만세시위에 참여하여 헌병주재소에 투석하고 주재소 경계원과 보조원을 구타·응징하는 등 활동하였다.

오후 2시 시위대열이 진북면 사동리 다리앞에 이르렀을 때, 급보를 받고 출동한 일본 헌병과 보조원 8명 및 재향군인 30여 명이 시위군중과 충돌하였다. 그때 마산(馬山)에서 응원 출동한 일본군 야포대대 군인이 무차별 사격을 가하였다. 이 발포로 8명이 순국하고 22명이 부상하였으며 군중들은 해산하였다.

그는 이 일로 붙잡혀,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으로 징역 1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9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5輯 1230∼1232·1234·1235面
  • 身分帳指紋原紙(警察廳)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영종 - 경상남도 창원(昌原) 창원군 만세운동
본문
1890년 3월 17일 경상남도 창원군(昌原) 진전면(鎭田面) 근곡리(斤谷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당시 진전면 근곡리 구장으로 농업에 종사하다가 4월 3일 경상남도 창원군 진동면·진북면·진전면 등의 주민들이 모여 함께 거행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이 시위는 1919년 만세운동 가운데 4대 만세시위 중 하나로 평가되며, 삼진만세시위라고도 불린다.1919년 3월 28일 창원군 진동면 고현시장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에서 일제 경찰의 검거를 피한 변상태(卞相泰)·변상헌(卞相憲)·권영대(權寧大)·권태용(權泰容) 등 주도인물들은 일단 피신하여 비밀리에 2차 의거를 도모하였다. 음력 삼월 삼짇날인 4월 3일 진전면 양촌리(良村里) 냇가에서 진동면·진전면·진북면 면민들을 동원하여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1919년 4월 2일 을치리(栗峙里) 김순삼(金順三)의 집을 방문했다가 4월 3일의 만세시위 참가를 권유하러 온 권태용을 만났다. 이에 시위 참가를 약속하니 권태용은 4월 3일 만세시위에 동리 사람들을 동원해 줄 것과 태극기 제작을 부탁하였다. 집에서 김한봉, 김원종 등과 만나 함께 독립운동 참가를 논의하고 태극기를 만들었고, 시위 당일인 3일 김봉조 외 29명을 인솔하고 시위장소인 양촌리 냇가로 집결하였다.진천면 양촌리 냇가에 큰 태극기가 세워지자 3면(面)의 주민들이 운집하기 시작하였다. 오전 11시경 변상섭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변상태의 선창에 따라 독립만세를 불렀다. 그리고 시위대 1,500명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양촌리로부터 진동면(鎭東面)으로 행진하였다. 이때 진전면에서 행진해 오는 시위대를 기다리던 진동면민들도 이에 가세하여 시위대는 약 5,000명으로 늘어났다.오후 2시경 시위대가 진북면 사동리(社洞里) 다리 앞에 이르렀을 때, 급보를 받고 출동한 일본 헌병과 보조원 8명, 재향군인 30여 명이 시위군중과 충돌하였다. 시위대와 함께 헌병주재소 경계원과 조선인 헌병보조원에 대항하여 맨몸으로 싸웠다.오후 3시 무렵 마산에서 증파된 일본군 야포대대가 합세하여 무차별 사격을 가하며 무력으로 진압하였다. 그 결과 8명이 사망하고 22명이 부상당했으며, 시위대도 해산당하였다. 이때 주도 인물 30여 명과 함께 붙잡혔다.이 일로 1919년 11월 6일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의 재판 이후 재판권 관할문제로 오랫동안 구류되어 있다가,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미결구류일수 중 360일 본형 산입)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대한민국 정부는 1999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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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소요 본건은 당지청의 관할이 아님, 구류장(勾留狀)은 유지함 부산지방법원마산지청 1919-11-06 국가기록원
2 판결문 내란 경성지방법원을 관할재판소로 지정 고등법원특별형사부 1920-03-22 국가기록원
3 판결문 보안법위반 본건 공소를 수리하지 않음 경성지방법원형사부 1920-08-07 국가기록원
4 판결문 보안법위반 징역 1년(원판결 취소), 미결구류일수 중 360일 본형 산입 경성복심법원형사부 1920-10-30 국가기록원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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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소재지
국내산재 경상남도 창원시

관련 현충시설 정보

도움말
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비석 창원읍민 만인운동비 경상남도 창원시
2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3 비석 삼진 독립의거 기념비 경상남도 창원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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