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4권(2000년 발간)
경남 창원(昌原) 사람이다.
1919년 4월 3일 경남 창원군 진전면(鎭田面)·진북면(鎭北面)·진동면(鎭東面)의 연합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3월 28일 진동면 고현리(高縣里) 장날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후, 피신했던 변상태(卞相泰)·권령대(權寧大)·권태용(權泰容) 등에 의해 계획되었다.
이때 김영종은 이들의 계획을 접하게 되자, 이에 적극 찬동하고 변상섭(卞相攝)·황태익(黃泰益) 등과 연락을 취하며, 4월 3일 인근의 3개 면민들을 동원하여 진전면 양촌리(良村里)의 냇가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4월 1일 변상태·황태익 등은 변우범의 집에 모여 회의를 한 후, 동리 서당에서 태극기를 제작하여 미리 동리 사람들에게 배포해 주고, 인근지역을 순회하며 민들의 궐기를 호소하였다. 또한 그들은 4월 2일 정오쯤, 진전면 양촌리 토지개간장에서 약 7∼8명의 군중에게 독립운동에 참가하지 않는 자는 조선 사람이 아니고 금수와 같아 후환이 있을 것이라는 경고도 하였다.
4월 3일 오전 9시, 수천 여명의 시위군중이 양촌리 냇가에 집결하였다. 변상섭의 독립선언서 낭독에 이어 변상태가 독립만세를 선창하자 양촌리 계곡은 온통 태극기의 물결 속에 독립만세의 소리로 진동하였다. 그리고 시위군중이 독립만세를 외치며 진동면의 헌병주재소로 몰려갔다. 김영종은 만세시위에 참여하여 헌병주재소에 투석하고 주재소 경계원과 보조원을 구타·응징하는 등 활동하였다.
오후 2시 시위대열이 진북면 사동리 다리앞에 이르렀을 때, 급보를 받고 출동한 일본 헌병과 보조원 8명 및 재향군인 30여 명이 시위군중과 충돌하였다. 그때 마산(馬山)에서 응원 출동한 일본군 야포대대 군인이 무차별 사격을 가하였다. 이 발포로 8명이 순국하고 22명이 부상하였으며 군중들은 해산하였다.
그는 이 일로 붙잡혀,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으로 징역 1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9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5輯 1230∼1232·1234·1235面
- 身分帳指紋原紙(警察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