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6권(1988년 발간)
경상남도 의령(宜寧) 사람이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의령읍 장날을 기하여 구여순(具汝淳)·최정학(崔正學) 등 동지들과 의령 3·1운동을 주도한 다음 상해로 망명하였다.
1920년 귀국하여 부산에서 안희제(安熙濟)·김효석(金孝錫) 등과 함께 백산무역주식회사(白山貿易株式會社)를 설립하여 경영하면서 비밀리에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였다. 또한 한인은행(韓人銀行) 설립을 추진하기도 했다. 1926년에는 서울에서 시대일보(時代日報), 1927년에는 중외일보(中外日報)를 창립하여 경영하면서 민족의식의 고취에 노력하였다. 1929년 10월에는 조선어연구회(조선어학회의 전신)의 조선어사전편찬회에 가입하여 지원하였다. 조선어학회 기관지인 『한글』의 편집비를 지원했으며, 1935년부터는 이 인(李仁)·김양수(金良洙)·장현식(張鉉植) 등과 함께 조선어사전 편찬의 촉진을 위한 비밀 후원회를 조직하여 거액의 재정지원을 하였다.
1942년 1월에는 서울에서 국가적 인재양성을 목적으로 이 인·이은상(李殷相)·이극노(李克魯)·이윤재(李允宰) 등과 조선양사원(朝鮮養士院)을 조직하여 재정지원을 하였다.
1942년 10월에 일제가 한국민족 말살정책의 일환으로 한국어 말살정책을 대폭 강화하고 한국 운동자들을 탄압하기 위하여 만들어 낸 조선어학회사건(朝鮮語學會事件)으로 구속되어 함경남도 홍원경찰서와 함흥경찰서에서 잔혹한 고문과 악형을 받았으며, 1943년 9월 18일 함흥지방법원에서 기소유예로 석방되었으나, 실질적으로 1년간의 옥고를 겪었다.
1945년 8·15광복 후에는 서울대학교의 교수로 재직하면서 국문학 연구에 큰 업적을 남겼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9권 409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8권 501·1002·1007·1011·1015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308·31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