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권(1986년 발간)
경상북도 울진(蔚珍) 출신이다.
1906년 3월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고 신돌석(申乭石) 의병장이 울진과 평해(平海)에서 의병 오백여 명과 더불어 창의의 기치를 올리자 의진에 입대하여 군령장(軍令將)으로 활약하였다.
1907년 2월 신돌석 의진이 울진을 야습하여 탈환하였을 때 울진 내에 의병 수명을 잔류시켰는데, 이들에 대비하기 위하여 일군 1개 소대 병력이 상주하고 있었다.
이 정보를 포착한 의진은 신돌석 의진과 성익현(成益鉉) 의진이 합진하여 재탈환하는데 성공하였다.
1908년 2월 성익현 부대가 칠보산(七寶山)에서 적과 접전하던 중 많은 사상자를 내면서도 일본 헌병들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이때 송병준(宋秉畯)이 의병해산 선유사(義兵解散宣諭使)로 활약하는 한편 통감부와 협조하여 이 일대에 일본 헌병을 증파시켜 의병을 산간 지대로 몰아 포위망을 압축시켜 왔다.
그러나 의병들은 굴하지 않고 분진항전(分陣抗戰)을 계속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경태(鄭敬台) 의진은 울진전투에서 130여명의 전사자를 내었으며, 8월에 당시 포군으로 활약하던 이윤명은 적에게 체포되어 대구에서 사형,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신돌석장군실기 23면
- 울진의병사 427·428·429·43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