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3권(1987년 발간)
경상남도 창원(昌原) 사람이다.
1919년 4월 3일의 진전면(鎭田面)·진북면(鎭北面)·진동면(鎭東面)의 연합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3월 28일의 진동면 고현리(古縣里) 장날을 이용하여 변상태(卞相泰)·권영대(權寧大)·권태용(權泰容)등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한 후 이곳 청년유지인 황태익(黃泰益)·김영종(金永鍾)·구수서(具守書)·변상술(卞相述)·변우범(卞又範) 등과 연락을 취하여 4월 3일 인근의 3개면민들을 동원하여 진전면 양촌리(良村里)의 냇가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는 4월 1일 변상태·황태익 등과 함께 변우범의 집에 모여 회의를 한 후, 동리 서당에서 태극기를 제작하여 미리 나누어주고, 인근지역을 순회하며 주민의 참여를 촉구하였다. 그는 4월 2일 아침 변상헌(卞相憲)·변상술과 함께 진전면 봉암리(鳳岩里)의 박영섭이 경영하는 식당에서 구장인 구수서를 만나 동리사람들의 동원을 부탁하고 이날 정오경, 권영대·변상태와 함께 진전면 양촌리 토지개간장에서 작업중이던 80여명의 인부들에게 동참할 것을 권유하였다.
4월 3일 오전 9시, 양촌리 냇가에 모인 1천 5백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친 뒤, 헌병주재소가 있는 진동면으로 시위행진을 전개하였다. 한편 진동면에서도 별도로 독립만세시위를 하던 시위군중이 진전면으로부터 시위행진하여 오고 있던 그들 대열과 합세하여 시위군중은 5천여명으로 늘어났다.
오후 2시경, 시위대열이 진북면 사동리(社洞里) 다리앞에 이르렀을 때, 급보를 받고 진동 헌병주재소에서 출동한 8명의 헌병보조원 및 30여명의 재향군인은 이들과 충돌하였다. 그는 시위군중과 함께 맨주먹으로 용감히 항전하였으나, 오후 3시 응원 요청을 받고 출동한 마산(馬山)주둔 일본군 야포대대의 야만적인 발포로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해산하였다.
그후 일제의 검속 때 그는 주동자로 체포되어 이듬해 10월 30일 경성(京城)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175·176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권 1230∼1235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243·245·246·249·25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