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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1921
성명
한자 金昌吾
이명 金昌浩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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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의병 포상년도 1990 훈격 애국장
1907년 1월 황해(黃海) 평산(平山), 마산(馬山) 등지에서 의병대장(義兵大將) 민백현 의진(閔白鉉義陣)돌격장(突擊將)으로서 의병(義兵) 150여명을 인솔 백천(白川)경무파소(警務派所)우편국(郵便局)을 점령하고 무기다수를 노획한 후 동년 7월 백천(白川) 국근리전투(菊根里戰鬪)에서 접전(接戰)순국(殉國)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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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권(1986년 발간)

황해도 연백(延白) 출신이다.

1907년 정미7조약(丁未七條約)이 강제로 체결되고 이때 교환된 비밀 각서에 의해 8월 1일 한국군마저 강제로 해산되기에 이르렀다. 김창오는 통탄함을 금치 못하고 의병장 박기섭(朴箕燮)의 의진에 입대하였다.

본래 박기섭은 영남인이었으나 당시 목천(木川)부사로 임명되어 왔었다.

그 즈음 항일 의병운동이 전국적으로 뻗어 가고 있을 때 전 군부대신 신기선(申箕善)이 명범석(明範錫)·신종균(申宗均)을 시켜서 박기섭에게 왕의 밀지를 전달하였다.

한편 황해도 유림 인사들이 거의할 것을 의논하고 박기섭을 의병 대장으로 추대하였다. 그리하여 박기섭 의진이 형성되고 곧이어 다음과 같은 진용이 가다듬어졌다.

의 병 장 박기섭(朴箕燮)

중 군 우병렬(禹炳烈)

총 무 박양섭(朴陽燮 후에 閔泳元으로 바뀜)

참 모 정회규(鄭會奎)·신 석(申석)·채홍구(蔡洪九)

서 기 신필수(申弼秀)·이창하(李昌夏)

덕무(德務) 오식영(吳植英)

유 격 장 유달수(柳達秀 곧 李鎭龍으로 바뀜)

유격대서기 이범학(李範鶴)

군 모 조낙승(曺洛承)·김기한(金起漢)

돌 격 장 김창호(金昌浩)

즉 김창오는 창호라는 이름으로 의병활동에 참여하여 박기섭 의진에서 돌격장으로 임명된 것이다.

이는 그가 본래 걷고 뛰는 것이 나는 듯이 빠른 것(如飛)으로 유명하였기 때문이었다.

10월 8일 김창오는 의병 돌격대를 거느리고 배천(白川)읍을 습격하여 군아(郡衙)의 경무 분견소·우편국을 점령하였다.

여기에 수장되어 있던 무기를 모두 접수하여 의병에게 나누어주어 병력을 보완시켰다. 이어서 약 150명의 부대원을 거느리고 연안읍을 습격하였다. 그리하여 이때 해주 일군 수비대에서 파견되어 온 하야(河野) 소대와 2시간에 걸쳐 완강한 격전을 벌여 적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많은 부상병을 내었다.

이 전투는 군대해산 후 황해도에서 전개된 의병 투쟁 가운데 선구적 역할을 한 가장 큰 항쟁으로서 이 이후 황해도 의병투쟁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러나 돌격장 김창오는 애석하게도 배천 국근리(菊根里) 전투에서 전사하고 그의 동생 성호(醒浩) 역시 적에게 체포되어 순국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 전투를 계기로 하여 황해도에서 의병들이 일군과 격전을 벌인 큰 전투만도 19회에 달하여 적에게 커다란 타격을 주게 되었다.

그리고 그후 박기섭 의병 부대 의병들 가운데 살아 남은 의병들은 만주로 망명하여 조국 광복을 위한 독립운동에 가담하여 크게 활약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권 624·625·626·627·713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창오 김창호(金昌浩) 황해도 연백(延白) 박기섭 의병부대
본문
1860년 5월 7일 황해도 연백군(延白郡) 금산면(金山面) 장현리(長峴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김창호(金昌浩)이다. 1907년 황해도 지역의 박기섭 의병부대에서 활동하였다.1907년 6월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한 일제의 압력으로 인해 광무황제는 7월 19일 황제의 직을 양위하였다. 또한 7월 24일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으로 대한제국은 행정권을 일제에 병탄 당하였고, 협약 시행령에 준하는 부수각서(附隨覺書)를 통해 징병제에 의한 정예군을 양성한다는 미명 하에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시키는 조치가 취해졌다. 이에 따라 대한제국 군대는 1907년 8월과 9월에 걸쳐 공식적으로 해산되었다. 일제는 1907년 9월 총포급화약단속법을 공포하여 한국인의 무기 소지를 금지하였고, 기존에 소지한 총포류는 반납할 것을 강요하였다. 기존의 유림 중심의 의진에 더하여, 대한제국 군인들과 산악 지역 산포수들은 위 조치에 항거하여 각지에서 의병으로 분기하였다.일제는 1907년 7월 하순 대한제국 군대 해산 이전에 한국에 일본군 보병 제12여단을 추가로 파병하였고, 이후 의병 탄압을 목적으로 도합 4차에 걸친 여단급 병력을 증파하였다. 의병은 1907년 11월부터 1909년까지 일본군과 약 5,000회의 전투를 치렀으며, 전투에는 12만 명의 의병이 참가하였다. 일제는 1907년 11월에서 1908년 7월까지 매달 평균 1,000여 명의 의병을 학살하였다.황해도 지역은 을미의병 이래 화서학파(華西學派)의 유림들을 중심으로 한 의병 활동이 활발하였던 곳이다. 1907년 이후 의병장 박기섭(朴箕燮)의 부대에 합류하여 황해도 평산(平山) 부근에서 돌격장으로 활동하였다. 10월 8일 평산군 신암면(新巖面) 배천읍(白川邑)을 습격하여 분견소(分遣所)와 우편국(郵便局)을 점령하고 무기를 노획하였다. 1908년 2월 5일 배천읍 국근리(菊根里)에서 일본 군경과 교전을 벌이다 전사하였다.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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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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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소재 국립묘지 외 독립유공자가 안치된 단일묘소가 북한지역에 있는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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