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권(1986년 발간)
황해도 연백(延白) 출신이다.
1907년 정미7조약(丁未七條約)이 강제로 체결되고 이때 교환된 비밀 각서에 의해 8월 1일 한국군마저 강제로 해산되기에 이르렀다. 김창오는 통탄함을 금치 못하고 의병장 박기섭(朴箕燮)의 의진에 입대하였다.
본래 박기섭은 영남인이었으나 당시 목천(木川)부사로 임명되어 왔었다.
그 즈음 항일 의병운동이 전국적으로 뻗어 가고 있을 때 전 군부대신 신기선(申箕善)이 명범석(明範錫)·신종균(申宗均)을 시켜서 박기섭에게 왕의 밀지를 전달하였다.
한편 황해도 유림 인사들이 거의할 것을 의논하고 박기섭을 의병 대장으로 추대하였다. 그리하여 박기섭 의진이 형성되고 곧이어 다음과 같은 진용이 가다듬어졌다.
의 병 장 박기섭(朴箕燮)
중 군 우병렬(禹炳烈)
총 무 박양섭(朴陽燮 후에 閔泳元으로 바뀜)
참 모 정회규(鄭會奎)·신 석(申석)·채홍구(蔡洪九)
서 기 신필수(申弼秀)·이창하(李昌夏)
덕무(德務) 오식영(吳植英)
유 격 장 유달수(柳達秀 곧 李鎭龍으로 바뀜)
유격대서기 이범학(李範鶴)
군 모 조낙승(曺洛承)·김기한(金起漢)
돌 격 장 김창호(金昌浩)
즉 김창오는 창호라는 이름으로 의병활동에 참여하여 박기섭 의진에서 돌격장으로 임명된 것이다.
이는 그가 본래 걷고 뛰는 것이 나는 듯이 빠른 것(如飛)으로 유명하였기 때문이었다.
10월 8일 김창오는 의병 돌격대를 거느리고 배천(白川)읍을 습격하여 군아(郡衙)의 경무 분견소·우편국을 점령하였다.
여기에 수장되어 있던 무기를 모두 접수하여 의병에게 나누어주어 병력을 보완시켰다. 이어서 약 150명의 부대원을 거느리고 연안읍을 습격하였다. 그리하여 이때 해주 일군 수비대에서 파견되어 온 하야(河野) 소대와 2시간에 걸쳐 완강한 격전을 벌여 적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많은 부상병을 내었다.
이 전투는 군대해산 후 황해도에서 전개된 의병 투쟁 가운데 선구적 역할을 한 가장 큰 항쟁으로서 이 이후 황해도 의병투쟁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러나 돌격장 김창오는 애석하게도 배천 국근리(菊根里) 전투에서 전사하고 그의 동생 성호(醒浩) 역시 적에게 체포되어 순국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 전투를 계기로 하여 황해도에서 의병들이 일군과 격전을 벌인 큰 전투만도 19회에 달하여 적에게 커다란 타격을 주게 되었다.
그리고 그후 박기섭 의병 부대 의병들 가운데 살아 남은 의병들은 만주로 망명하여 조국 광복을 위한 독립운동에 가담하여 크게 활약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권 624·625·626·627·71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