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3권(1987년 발간)
충청남도 천안(天安) 사람이다.
1919년 4월 1일 홍일선(洪鎰善)·김교선(金敎善)·한동규(韓東奎)·이순구(李旬求)·조인원(趙仁元)·유관순(柳寬順) 등과 함께, 갈전면(葛田面) 아우내(幷川) 장날을 이용하여 대대적인 독립만세시위를 일으킬 것을 계획하였다. 거사일인 4월 1일 그는 동지들과 함께 아우내 장터에 나아가, 시장 입구에서 장터에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할 것을 역설하며 활동하였다. 오후 1시경 조인원이 태극기와 『대한독립』이라고 쓴 큰 깃발을 세워놓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3천여명이 운집한 아우내 장터는 삽시간에 대한독립만세 소리로 온 천지가 진동하였다. 시위군중들이 여세를 몰아 헌병주재소로 접근하자 시위대의 기세에 놀란 일본 헌병이 기총을 난사하고, 또 천안에서 불러들인 일본 헌병과 수비대들이 무차별 총검을 휘둘러, 유관순의 아버지 유중권(柳重權) 등 19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30명 이상이 부상하였다.
이때 사망자의 가족과 친지가 일본 군경들의 야만적인 발포로 순국한 시체를 헌병 주재소로 옮겨놓고 『살려내라』고 강력히 항의하고 있을 무렵, 그는 김교선·한동규·이순구와 함께 100여명의 시위군중을 이끌고 주재소로 몰려가서 주재소장에게 사망자에 대하여 책임을 지고, 또 유치장에 구금된 자들을 석방시킬 것을 강력히 요구하다가 체포되었다. 결국 이해 5월 21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159, 173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123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권 1160, 116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