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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1512
성명
한자 具男會
이명 具南會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1992 훈격 대통령표창
1919. 3. 13 경남(慶南) 창녕(昌寧) 영산읍(靈山邑)에서 결사단(決死團)을 조직하고 다수 군중을 규합하여 태극기와 결의문을 배포하여 주며 독립만세시위를 선도하다 피체되어 징역 8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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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0권(1993년 발간)

경남 창녕(昌寧) 사람이다. 1919년 3월 13일 창녕군 영산읍(靈山邑)에서 구중회(具中會)·장진수(張振秀) 등과 같이 결사단(決死團)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에서 후퇴하는 자는 생명을 빼앗긴다'는 맹세서에 서명하고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계획하였다. 그들은 태극기와 선언문을 만들어 주민들에게 배부하고 다수의 군중을 규합하여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는 등 시위를 전개하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이해 5월 10일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형을 선고받고 공소하여 6월 17일 대구복심법원에 원판결이 부분 취소되었으나 형은 그대로 8월로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5집 1226∼1229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3권 228∼232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구남회 구남회(具男會) 경상남도 창녕 영산면 3·1운동
본문
1901년 7월 3일 경상남도 창녕군(昌寧郡) 영산면(靈山面) 동리(東里)에서 태어났다. 이름을 구남회(具男會)라고도 썼다. 부친은 구종서(具宗書)이고, 창녕군 영산면 3·1운동을 이끈 구중회(具中會)가 친형이다. 영산공립보통학교(靈山公立普通學校)를 졸업하였다. 1919년 3월 경남 창녕군 영산면 3·1만세운동은 구중회를 중심으로 계획되었다. 3월 12일 장진수(張振秀)·김추은(金秋銀) 등과 함께 구중회 집에 모여 3월 13일로 예정한 거사를 논의하며 결사단(決死團)을 조직하였다. 13일 영산면 앞 남산(南山)에 올라 결사적인 투쟁으로 독립운동을 하겠다는 내용의 「결사단원맹세서」에 서명하고 시위운동 비용 갹출에도 동참하였다. 오후 2시경 미리 준비한 구한국기(舊韓國旗)를 흔들고 독립 만세를 외치는 한편, 징과 북을 두드리고 전진가(前進歌)라는 노래를 부르며 영산면 읍내로 들어갔다. 600~700명까지 늘어난 시위대는 오후 6시까지 영산 읍내를 누비면서 시위 행진을 전개한 뒤 다음날을 기약하고 스스로 해산하였다. 이때 창녕경찰서에서 급파한 경관 1개 대대가 도착하여 장진수·김추은 등 결사대 중 일부를 체포하여 창녕경찰서에 수감하였다. 이 소식을 전해 듣고 나머지 결사대원들과 함께 긴급모임을 갖고 구속 동지를 탈환하기로 결의하였다. 저녁 8시경 남산에 재차 집결하여 많은 군중과 함께 대한 독립 만세를 고창하며 창녕읍으로 행진하였으나 일본 경찰에게 다른 단원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대구형무소, 마산형무소 등에 수감되었다가 5월 10일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개월, 집행유예 2년 형을 선고받았다. 원심 검사가 항소하여 6월 1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8개월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겪었다. 출옥 후에는 영산으로 돌아와 청년운동과 농민운동에 매진하였다. 1920년 1월 장진수·구창서(具昌書) 등 청년들과 함께 천도교를 중심으로 계몽운동과 청년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1920년 6월 2일 구용서(具瑢書)·하만호(河萬浩) 등과 취성청년회(鷲城靑年會)를 결성하였는데, 청년회관 내에 개설한 노동 야학의 교사로 활동하면서 노동자들을 교육하였다. 12월에는 조선 내 여러 청년운동 단체를 규합한 조선청년회연합회(朝鮮靑年會聯合會) 창립총회에 취성청년회 대표로서 참석하였다. 1921년 9월 구중회·구창서 등과 함께 진주경찰서로 연행된 일이 있었는데, 정확한 혐의는 알 수 없으나 상하이(上海)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방문하고 그 1주일 전에 귀국하였다는 내용의 언론 보도가 있다. 1923년 4월 조직된 영산소작인회에서 통상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23년에는 민립대학 설립을 위한 기성회에 장진수 등 4명과 함께 창녕군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1923년 『동아일보』 영산분국 기자로 임용되었다가 1925년 사임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도움말
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보안법위반 징역 8월(원판결 취소) 대구복심법원 1919-06-17 국가기록원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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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대전현충원 대전광역시 유성구
국립묘지 안장자 위치정보 시스템 바로가기

관련 현충시설 정보

도움말
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조형물 영산 3.1 봉화대 경상남도 창녕군
2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3 비석 영산 3·1독립운동 기념비 경상남도 창녕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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