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성신문(皇城新聞) 기자 및 오성학교(五星學校) 교사로 재직 중 한국역사를 서술하였다가, 1916년 12월 2일에 소위 보안법 위반의 혐의로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징역 8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더 이상 국내에서는 독립운동을 전개할 수 없을 것으로 판단하여 현 순(玄楯) 선우 혁(鮮于爀) 등과 함께 상해(上海)로 망명하였다. 상해에서는 많은 독립지사들이 각 처에서 모여들고 있었는데, 1919년 3월 하순경부터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의 간부인 여운형(呂運亨) 서병호(徐丙浩) 선우 혁(鮮于爀) 이광수(李光洙) 김 철(金徹) 현 순(玄楯) 여운홍(呂運弘)과 함께 상해에 독립임시사무소를 설치하고 각국에 향하여 독립선언을 하면서 임시정부 조직 업무에도 착수하였다.
그를 비롯하여 이동녕(李東寧) 이시영(李始榮) 조완구(趙琬九) 조성환(曺成煥) 조영진(趙英鎭) 여운형(呂運亨) 조용은(趙鏞殷) 현 순(玄楯) 윤현진(尹顯振) 신익희(申翼熙) 이광수(李光洙) 신석우(申錫雨) 조동호(趙東祜) 김 철(金徹) 신규식(申圭植) 신채호(申采浩) 선우 혁(鮮于爀) 한진교(韓鎭敎) 등 30여 명은 불란서조계 보창로(寶昌路)에 허름한 집을 빌어 임시사무소로 정하고 모여서 비밀회의를 거듭하였다.
그리하여 1919년 4월 10일부터는 상해에 모인 각 지방 출신과 대표자들을 의원으로 하는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회의를 열고, 국호, 관제(官制), 정부 관원 및 임시헌장 등을 의결 선포함으로써 역사적인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탄생을 보게 되었다. 그는 임시의정원의 초대 경기도 선출의원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1919년 5월에 상해 대한민국 거류민단이 조직되었는데 이는 당시 상해에 거류하고 있는 한인 자치기관인 동시에 임시정부를 협조하여 재정의 조달과 기타연락임무 등을 담당하는 독립운동의 표면단체이었다. 단장에는 여운형(呂運亨)이 취임하였으며, 그는 장 붕(張鵬) 고일청(高一淸) 이유필(李裕弼) 김홍서(金弘 ) 등과 함께 의사원(議事員)으로 선임되었다.
동년 7월에는 상임위원회 내무위원장, 국제연맹제출안 작성특별위원회 위원, 원법(院法)제정위원 등에 선출되어 활동하였으며, 또한 같은 해 8월에는 임시정부의 방략과 계획이 수립됨에 따라 종래 집단지도체제의 국무위원 제도를 고쳐 다시 차장제로 환원하고 각 부 차장 및 국무원 비서장을 선임하여 정해진 계획을 능률적으로 운영 실천하게 되었는데 이때 그는 국무원 비서장에 선임되어 동년 11월까지 복무하였다.
11월 24일에는 박은식(朴殷植)을 회장으로 하는 대한교육회(大韓敎育會)에 편집부원이 되어 복무하였으며, 1922년 7월에는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하여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을 위해서 진력하였다.
1924년 5월에는 제10대 의정원 의장에 피선되었으며, 1926년 8월 18일까지 임시의정원에 참여하였다. 1925년에는 "신민보(新民報)"발행, 3 1공학(三一公學)설립 등의 활동을 하였으며, 김규식(金奎植) 여운형(呂運亨) 등과 민족계몽을 위하여 헌신하였다.
또한 1926년 7월부터는 일시 임정국무원에 임명되어 복무하기도 하였으며, 1927년 4월에는 한국노병회(勞兵會) 제5회 정기총회에서 이사(理事)에 당선되어 활동하였다.
1930년에 일본영사관 경찰에 의하여 체포되어 본국으로 압송되었으며, 1930년 11월 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징역 3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33년 8월 출옥 후 가족을 찾아 다시 상해로 갔으나 고문과 옥고의 여독으로 반신불수가 되어 계속 활동하지 못한 사실이 확인됨.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5권(1988년 발간)
서울 계동(桂洞) 사람이다.
황성신문(皇城新聞) 기자 및 오성학교(五星學校) 교사로 재직 중 한국역사를 서술하였다가, 1916년 12월 2일에 소위 보안법 위반의 혐의로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징역 8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더 이상 국내에서는 독립운동을 전개할 수 없을 것으로 판단하여 현 순(玄楯) 선우혁(鮮于爀) 등과 함께 상해(上海)로 망명하였다. 상해에서는 많은 독립지사들이 각 처에서 모여들고 있었는데, 1919년 3월 하순경부터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의 간부인 여운형(呂運亨) 서병호(徐丙浩) 선우혁(鮮于爀) 이광수(李光洙) 김 철(金徹) 현 순(玄楯) 여운홍(呂運弘)과 함께 상해에 독립임시사무소를 설치하고 각국에 향하여 독립선언을 하면서 임시정부 조직 업무에도 착수하였다.
그를 비롯하여 이동녕(李東寧) 이시영(李始榮) 조완구(趙琬九) 조성환(曺成煥) 조영진(趙英鎭) 여운형(呂運亨) 조용은(趙鏞殷) 현 순(玄楯) 윤현진(尹顯振) 신익희(申翼熙) 이광수(李光洙) 신석우(申錫雨) 조동호(趙東祜) 김 철(金徹) 신규식(申圭植) 신채호(申采浩) 선우혁(鮮于爀) 한진교(韓鎭敎) 등 30여 명은 불란서조계 보창로(寶昌路)에 허름한 집을 빌어 임시사무소로 정하고 모여서 비밀회의를 거듭하였다.
그리하여 1919년 4월 10일부터는 상해에 모인 각 지방 출신과 대표자들을 의원으로 하는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회의를 열고, 국호, 관제(官制), 정부 관원 및 임시헌장 등을 의결 선포함으로써 역사적인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탄생을 보게 되었다. 그는 임시의정원의 초대 경기도 선출의원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1919년 5월에 상해 대한민국 거류민단이 조직되었는데 이는 당시 상해에 거류하고 있는 한인 자치기관인 동시에 임시정부를 협조하여 재정의 조달과 기타연락임무 등을 담당하는 독립운동의 표면단체이었다. 단장에는 여운형(呂運亨)이 취임하였으며, 그는 장 붕(張鵬) 고일청(高一淸) 이유필(李裕弼) 김홍서(金弘敍) 등과 함께 의사원(議事員)으로 선임되었다.
동년 7월에는 상임위원회 내무위원장, 국제연맹제출안 작성특별위원회 위원, 원법(院法)제정위원 등에 선출되어 활동하였으며, 또한 같은 해 8월에는 임시정부의 방략과 계획이 수립됨에 따라 종래 집단지도체제의 국무위원 제도를 고쳐 다시 차장제로 환원하고 각 부 차장 및 국무원 비서장을 선임하여 정해진 계획을 능률적으로 운영 실천하게 되었는데 이때 그는 국무원 비서장에 선임되어 동년 11월까지 복무하였다.
11월 24일에는 박은식(朴殷植)을 회장으로 하는 대한교육회(大韓敎育會)에 편집부원이 되어 복무하였으며, 1922년 7월에는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하여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을 위해서 진력하였다.
1924년 5월에는 제10대 의정원 의장에 피선되었으며, 1926년 8월 18일까지 임시의정원에 참여하였다. 1925년에는 "신민보(新民報)"발행, 3 1공학(三一公學)설립 등의 활동을 하였으며, 김규식(金奎植) 여운형(呂運亨) 등과 민족계몽을 위하여 헌신하였다.
또한 1926년 7월부터는 일시 임정국무원에 임명되어 복무하기도 하였으며, 1927년 4월에는 한국노병회(勞兵會) 제5회 정기총회에서 이사(理事)에 당선되어 활동하였다.
1930년에 일본영사관 경찰에 의하여 체포되어 본국으로 압송되었으며, 1930년 11월 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징역 3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33년 8월 출옥 후 가족을 찾아 다시 상해로 갔으나 고문과 옥고의 여독으로 반신불수가 되어 계속 활동하지 못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8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신분장지문조회회보서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85·186·339·344·360·362·399면
- 고등경찰요사 15·88·90·92·95·96·105면
- 무장독립운동비사 25·26·34·37면
- 기려수필 243·244면
- 벽옹김창숙일대기 143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분책 616·617면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8권 228·239면
- 임시정부의정원문서(국회도서관) 50·51·53·54·55·56·59·79·84·86·87·92·93·103·106·160·161·162·192·616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734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4권 61·113·156·157·200·201·208·213·554면
- 조선민족운동연감 2·6·18·20·21·22·23·24·25·35·36·45·56·84·94·167·191·192·198·202·203·208·214·264면
- 민족독립투쟁사사료(해외편) 12·36·48·66·75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2권 3·143·427·438·439·447·508·530·642·663·697·736면
- 한국민족운동사료(중국편)(국회도서관) 42·43·45·48·54·151·152·218·275·290·330·415·420·439·510·519·536·548·583·597·599·617·638·65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