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23권(2017년 발간)
1909년 9월~1910년 1월경 경기도 양주군(楊州郡)ㆍ포천군(抱川郡)ㆍ영평군(永平郡)ㆍ적성군(積城郡)ㆍ연천군(漣川郡) 등지에서 전성서의진(全聖西義陣)에 참여하여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07년 일제에 의해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 해산되자, 경기도 적성군 출신으로 한국군 정교였던 정용대(鄭用大)는 의병장이 되어 적성ㆍ양주ㆍ교하군(交河郡) 등지에서 전과를 올렸다. 이은찬의진(李殷贊義陳)ㆍ윤인순의진(尹仁淳義陳)과 연합하여 활동하다 1909년 10월 28일 일본 토벌대에 체포되었다. 이때 정용대의진의 선봉장이었던 전성서는 부하를 모아 양주 등지에서 강기동의진(姜基東義陣)과 연합하거나 연기우의진(延基羽義陣)과 연계하며 활동을 하였다.
한인수는 1909년 9월경부터 1910년 1월경 사이에 강기동의 좌군인 전성서의 부하가 되어 13명의 의병과 함께 경기도 양주ㆍ포천ㆍ영평ㆍ적성ㆍ연천군과 황해도 등지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1910년 1월 13일 체포되었다.
1910년 3월 2일 경성지방재판소(京城地方裁判所)에서 이른바 강도죄로 징역 2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6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判決文(京城地方裁判所 : 1910. 3. 2)
- 大韓每日申報(1910. 1. 18, 3. 4)
- 皇城新聞(1910. 3.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