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2권(1986년 발간)
충청남도 천안(天安) 사람이다.
1919년 4월 1·2에 걸쳐 안성군 원곡면(元谷面)·양성면(陽城面)에서 일어난 독립만세 시위거사를 위하여 이유석(李裕奭)·홍창섭(洪昌燮)·이근수(李根洙)·이덕순(李德順)·이희용(李熙龍) 등과 미리 상의하고 준비를 갖추고 있다가 그 시위운동을 지휘하였다. 그는 고종황제(高宗皇帝)의 인산(因山)을 참관(參觀)하기 위하여 서울에 올라갔다.
3월 1일 독립만세시위를 직접보고 고향에서도 독립만세 시위를 거사해야겠다고 결심하여 귀향한 후 3월 28일 동리민 이시연(李時蓮) 이시순(李時順) 등과 독립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정하고, 그 취지를 칠곡리 주민에게 알려주어 원곡면 사무소로 달려가 독립만세를 외쳤는데, 원곡면·양성면에서는 면민이 서로 모여 산발적으로 만세시위를 3월 31일까지 계속하였다.
3월 31일날 만세시위를 마치고 내일 밤에는 대대적으로 만세시위를 하자고 약속하고 귀가하였다.
4월 1일 오후 8시경 원곡면 사무소 앞에는 원곡리 주민을 중심으로 칠곡리 이유석·홍창섭, 외가천리 이근수, 내가천리 이덕순·이희용 등 주동자와 1천여 명의 만세시위군중이 모였는데 그때 선두에 나와서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고창하고, 일인 면장을 끌어내어 앞장세워 독립만세를 부르도록 하며 양성면 동항리(東恒里)로 행진시켰다. 행진 중 이유석·이덕순 등과 함께 경찰 주재소와 면사무소·우편소를 차례로 습격하도록 지휘하는 동시 일본인들은 이곳에 거주할 필요가 없으니 축출하라고 외치며 활동하다가 밤이 깊어 시위군중들이 귀가하는데 때마침 9시 30분경 양성 경찰 주재소 앞에서 시위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수백명의 양성면 시위군중 대열(隊列)과 마주쳐 자연스럽게 합세가 되었다. 시위군중이 급증하게 되니 사기가 충천하여 양성면 주재소로 되돌아가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시위를 하다가 주재소로 들어가 불을 지르니 다른 시위자가 가세하여 주재소 전체를 불살라 버리게 되었으며 이어서 양성 우편소로 달려가 판자문을 부수고 전화와 전신시설을 끄집어내어 소각시켜 버리고, 일본인이 경영하는 잡화점을 습격하여 진열상품을 못쓰게 부숴 버리고 나서 일본인 고리대금업자의 집으로 가서 가구와 기물 등을 소각시키기고 장지문을 파괴하였으며, 4월 2일 새벽 4시경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원곡면 사무소에 투석하여 건물을 파괴하고 방화하는 등 격렬한 만세시위를 계속하다가 체포되었다. 1921년 1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권 175∼177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권 422∼48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