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7권(1990년 발간)
전북 남원(南原) 사람이다.
1929년 봄부터 향리에서 형인 이두현(李斗鉉) 등과 함께 야학을 세워 문맹퇴치 활동을 펴면서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비밀리에 수양전진계(修養前進계)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그러던 중 일장기와 일본 왕의 사진을 찢어 소각한 일로 일경의 추적 대상이 되었다. 이렇게 되자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에 들어가야 한다며 1931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여기서 생고무 공장의 직공으로 일하며 일본 내의 좌익 민족운동단체에 참가하여 일제타도와 독립쟁취를 위해 노력하였다.
1933년 12월 일본노동조합 전국협의회(日本勞動組合全國協議會)에 가입하여 고베(神戶)지구 노조재건운동에 힘을 쏟았다. 또한 같은 해 12월 13일에는 일본공산청년동맹(日本共産靑年同盟)에도 가입하였고, 고베(神戶)시위원회 서부지구 조직책임자로 선임되어 청년동맹의 조직 정비와 확충을 위해 노력하였다.
1934년 1월에는 제2의 ‘쌀내놓으라회’를 결성한 뒤 건국제(建國祭), 실업반대투쟁, 기념일 투쟁 등의 시위를 주도하다가 같은 해 4월 일경에 붙잡혔다. 하지만 조사를 받던 중 탈출하여 1937년 1월 오사카(大阪)에서 김인택(金仁宅) 등 10여 명과 함께 좌익극단(左翼劇團)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또한 같은 해 4월에는 김철산(金鐵山) 등과 더불어 경제학이론연구회(經濟學理論硏究會)를 조직하여 회원들에게 사회주의 사상을 전파하고 지도하는 일에 힘을 쏟았다.
나아가 1938년 1∼2월 오사카시에서 공산주의그룹의 동지들과 함께 현 시국에 있어서 좌익 민족운동의 방침에 관하여 협의하기도 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펴다가 같은 해 7월 다시 일경에 붙잡혔다.
이후 1939년 11월 28일 일본 고베(神戶)지방재판소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판결통지문(1929. 12. 12. 신호지방재판소 검사국)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3권 470·572·610·61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