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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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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한자 金順福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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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
운동계열 의병 포상년도 2016 훈격 애족장
1907년 (陰) 10월 경기도(京畿道) 양주군(楊州郡)에서 이은찬 의진(李殷瓚義陣), 1909년 (陰) 10월 경기도(京畿道) 포천군(抱川郡)에서 강기동 의진(姜基東義陣)에 참여하여 군자금 모집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징역 7년을 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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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23권(2017년 발간)

1907년 음력 10월 경기도 양주군(楊州郡)에서 이은찬의진(李殷瓚義陣), 1909년 음력 10월 경기도 포천군(抱川郡)에서 강기동의진(姜基東義陣)에 참여하여 군자금을 모집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강원도 원주(原州) 출신의 의병장 이은찬은 을사늑약(乙巳勒約) 뒤 의병을 일으켜 활약하였다. 1907년 일제에 의해 군대가 해산된 이후 이인영(李麟榮) 부대의 중군장(中軍將)으로 활동하며 13도 연합의병부대를 편성하여 음력 12월에 전국연합의병부대의 서울 공략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그 뒤 포천 방면으로 이동하여 의병 활동을 지속하였다.

김순복은 이은찬의진에 들어가 1907년 음력 10월 11일 의병 50명과 함께 양주군 진벌리(榛伐里)에서, 이어 12일에는 포천군 내동면(內洞面)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였다.

의병장 강기동은 헌병보조원 출신으로 이은찬의진에서 선봉장으로도 활동하였다. 강기동의진은 1909년 남한대토벌(南漢大討伐) 이후 임진강 유역과 경기 북부 지역에서 가장 활발한 의병부대였다. 1909년 9월에 접어들면서 본격적으로 대일투쟁을 전개하였다.

김순복은 강기동의진에 들어가 1909년 음력 10월 의병 10여 명과 함께 포천군 송우리(松隅里)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 체포되었다.

1910년 6월 29일 경성지방재판소(京城地方裁判所)에서 이른바 강도미득재(强盜未得財)로 징역 7년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 1912년 9월 13일 대사령으로 형 집행을 면제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6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判決文(京城地方裁判所 : 1910. 6. 29)
  • 皇城新聞(1910. 6. 25)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4) 별집 제1집 144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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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순복 - 경기도 포천(抱川) 후기의병
본문
1883년 경기도 포천군(抱川郡) 내소면(內所面) 초가팔리(初加八里)에서 출생하였다. 집안 및 성장 과정, 직업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만들고자 하는 일본의 야욕이 본격화하였다. 1907년 헤이그특사사건으로 광무황제가 강제로 폐위당하고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이 체결되면서 그 같은 움직임이 더욱 노골화되었다. 대한제국 군대의 강제해산은 그 상징과도 같았다. 이후 해산된 군인들이 의병운동에 투신하면서 일본에 대한 무력 항쟁에도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었다. 1907년과 1909년 경기도 일대에서 활약한 이은찬(李殷瓚) 및 강기동(姜基東) 의병부대에 참여하여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은찬 의병장은 유생 출신으로 당초 1895년 을미사변 이후 봉기한 바 있고, 1907년 군대해산 이후 다시 의병 투쟁에 본격적으로 투신하였다. 이은찬은 이인영(李麟榮)을 중심으로 결성된 관동창의대 출범과 13도창의군으로 확대된 후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1907년 (음)10월 11일 이은찬의 지휘 아래 50여 명의 동료 의병과 함께 양주군(楊州郡) 진대리(榛代里)에서 군자금과 군수품 모집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이에 12일 다시 포천군 내동면(內洞面)으로 향해 다시 한 번 모집을 시도하였으나 이 또한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의병은 일정한 지역적 거점이 없었기 때문에 민간에서의 군자금 모금이 불가피하였지만, 이상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이은찬 의병부대는 민간으로부터 무리한 군자금 모금은 피하고 있었다. 한편, 강기동 의병장은 1881년 서울 태생으로 성장 이후 일본국 헌병대에 들어가 헌병보조원으로 일하였다. 그러던 가운데 1909년 1월 사로잡힌 의병들을 탈주시키면서 무기와 탄약을 함께 탈취해 이은찬 의병부대에 투신하였다. 강기동은 이은찬의 휘하에서 헌병보조원의 경험을 활용하여 우편물 탈취 등의 방법을 통해 군자금 마련에 큰 힘을 보탰다. 1909년 2월 25일 양주군의 전투로 이은찬 의병부대가 큰 타격을 입은 이후부터는 강기동이 독립하여 의병부대를 조직하고 대일 투쟁에 나서게 되었다. 강기동은 이은찬이 사망한 이후 경기 동북지방에서 가장 활발하게 의병 투쟁을 전개했던 의병장이다. 1909년 강기동 의병부대에서 의병 활동을 계속하여 (음)10월 초순 강기동의 지휘 아래 십인장(十人將)이 되었다. 휘하에 의병 10여 명을 데리고 포천군 송우리(松隅里)에서 군자금 및 군수품 모금을 시도하였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는 민간에서의 무리한 군자금 모금을 피하고자 했던 것으로 추측되며, 1909년 당시 일본의 의병 탄압이 극에 달했음을 생각한다면 쉽지 않은 태도였다고 할 수 있다. 1907년 이래 계속해서 의병 활동을 전개하다가 포천군 헌병분견소에 체포되어 1910년 6월 23일 지방재판소로 압송되었다. 이후 경성지방재판소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는데, 이전의 활동에 대해서 형법대전 제593조 제3호 미득재율의 혐의를 받았으나, 정상 참작되어 동법 제125조에 의하여 각 본형에서 3등이 감해져 징역 7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6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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