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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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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한자 姜元浩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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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의병 포상년도 1995 훈격 애국장
1908년 음력(陰曆) 12월부터 경기(京畿) 양주군(楊州郡) 일대에서 황순일(黃順一) 의병진(義兵陣)에 가담하여 총검으로 무장하고 군자금(軍資金)모집(募集)하는 활동을 하였으며, 1909년 음력(陰曆) 1월부터 7월까지 강기동(姜基東) 의병진(義兵陣)좌익대장(左翼大將)이 되어 헌병대(憲兵隊) 밀정 이일남(李一男) 외 2명을 처단(處斷)할 때 조력(助力)하고 헌병 밀정 전완준(全完俊)의 집을 불태우는 등 활동하다가 피체(被逮)되어 징역 15년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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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2권(1996년 발간)

평북 강계(江界) 사람이다.

황순일(黃順一)·강기동(姜基東) 의진에 가담하여 경기도 양주(楊州)·포천(抱川)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1907년 7월 일제는 「정미7조약(丁未7條約)」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키는 등 식민지화에 광분하였다. 이에 전국적으로 수많은 의병이 봉기하여 상실된 국권을 회복코자 노력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강원호는 의병에 투신하여 1908년 음력 12월경 의병장 황순일의 휘하에서 동지 30여 명과 함께 총검을 휴대하고 경기도 양주군 일탄면에 침입하였으나 군자금 획득에는 실패하였다. 이어 1909년 음력 1월경부터 경기도 양주군과 포천군 등을 주 무대로 군자금 확보와 친일파 처단에 주력하던 의병장 강기동의 휘하에 들어가 좌익대장(左翼大將)이 되어 각지를 무대로 활동하였다. 같은 해 5월 30일 강기동 의병장이 포천군 송산동(松山洞)에서 일본군 헌병대의 밀정인 이일남(李一男)·김윤흥(金允興)·노수원(盧守元) 등 3인을 잡아 처단할 때 척후를 담당하면서 조력하였다. 또한 그는 같은 해 7월 11일 양주군 둔야면(芚夜面) 누원(樓院) 전완준(全完俊)의 집에 돌입하여 "우리들의 행동을 의정부 헌병분견소에 통보하였으니 그곳의 밀정이다"고 그를 힐책하였다. 그러나 이 때 그가 도주하자 강기동 의병장과 의논하여 그의 집을 불태워 친일행위를 응징하는 등 주로 친일파 처단을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붙잡혔다. 그리하여 1910년 7월 18일 경성지방재판소에서 교수형을 받았으나, 이에 불복 공소하여 9월 7일 경성공소원에서 징역 15년으로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28·29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71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제1집 142·143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강원호 - 평북 강계(江界) -
본문
1882년 평안북도 강계군(江界郡) 북문(北門) 안에서 태어났다. 의병 활동 당시에는 서울 남대문(南大門) 낙천원(樂天院)에 거주하였다. 1908년 3월에 이은찬(李殷瓚) 의병장이 중심이 되어 실시한 서울 탈환 작전이 실패하고 이은찬 의병장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분개하여 강기동(姜基東)·남학서(南鶴西)·오수영(吳壽泳)·임명달(任明達) 등과 더불어 결사토적(決死討賊)할 것을 맹약한 후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일본군을 습격하였다. 그러다가 1908년 12월부터 황순일(黃順一) 의병부대에 가담하여 총검으로 무장하고, 경기 양주군(楊州) 일탄면 등 주로 양주군 일대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는 활동을 하였다. 1909년 음력 1월부터는 강기동 의병부대의 좌익대장(左翼大將)이 되어 경기도 일대에서 일본군 밀정을 처단하거나 군자금을 모집하는 활동을 하였다. 특히, 1909년 5월 30일에는 경기 포천 송산동(松山洞)에서 강원 간성(杆城) 읍내에 거주하는 22세 이일남(李一男), 강원 철원 장방산(長方山)에 거주하는 18세 김윤홍(金允興), 경북 용궁(龍宮) 읍내에 거주하는 20세 노수원(盧守元)을 일본군 헌병대 밀정이라고 하여 체포한 뒤 다음 날인 31일 경기 포천 가산면(加山面) 하성동(霞城洞) 죽엽산에서 총과 검으로 처단할 때 현장에서 주변을 경계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또 7월 11일에는 경기 양주 둔야면(芚夜面) 누원(樓院)에 거주하는 전완준(全完俊, 일명 전계홍[全季弘])의 집에 가서 의정부헌병분견소의 밀정이라고 하고, 의병을 밀고한 행동을 힐책하였다. 이에 전완준이 도주하자 그의 집을 불태웠다. 그뿐만 아니라 전완준의 집 부근에 있던 김사련(金士連)과 홍태선(洪泰先)의 집도 불태웠다. 당시 포천, 양주 일대에서 전개한 활동은 일본군에 상당한 피해를 주었다. 따라서 일본군은 이들 의병을 체포하기 위한 대대적인 수색을 실시하고자 1910년 6월 2일부터 약 1개월의 예정으로 포천군 무림리(茂林里)·고모리(古毛里)·능현(陵峴), 양주군 송현리(松峴里)에 하사 1명, 상등병 2명, 헌병보조원 6명으로 조직한 임시파견소를 설치하였다. 일본군의 수색에 의병 부대원은 개별적으로 흩어져 이동하였는데, 6월 15일 밤 포천 서면(西面) 장림동(長林洞)에서 경원철도측량반(京元鐵道測量班) 호위로서 양주 어등산면(於等山面) 지방에 출장 중이던 경성 필동 헌병에게 동료 3인과 함께 체포되었다. 체포된 직후 경성제2헌병분대로 이송되었다. 이후 1910년 7월 18일 경성지방재판소에서 교형(絞刑)을 선고받았으나, 경성공소원에서 원판결을 취소하고 징역 15년 형을 선고하여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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