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훈전자사료관 이달의 독립운동가 콘텐츠 심볼
최세윤
/
정원집
/
김영백
최세윤
, 1867 ~1916
, 독립장
(1968)
정원집
, (1877) ~(1909)
, 독립장
(1995)
김영백
, (1880) ~1910
, 독립장
(1982)
목차
목차를 누르시면 해당 위치로 이동합니다.
1. 국권을 침탈하는 일제에 맞선 한말의병
일본 제국주의의 국권침탈이 본격화되자 의병항쟁은 봄날의 들불처럼 전국의 방방곡곡으로 확산되었다. 특히 광무 황제의 강제 퇴위와 정미조약의 체결, 군대해산 등 일제의 정치·경제적 침략이 심화되면서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걱정하던 다양한 계층의 많은 우국지사들이 의병에 합류하였다.
이들은 열악한 여건 속에서 사생취의(捨生取義)의 정신으로 악전고투(惡戰苦鬪)하였다. 일제 군경의 잔혹한 진압으로 인해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채 전사하는 의병의 숫자가 갈수록 늘어났다. 일제는 의병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인권유린이나 비인도적 행위를 자행하였다. 그들은 의병들을 불법적으로 학살하는 경우가 많았다. 예컨대, 체포된 의병들을 도주를 빙자하여 일부러 학살하였으며, 부상당한 의병들을 공격하는 만행도 서슴지 않았다. 또한 그들은 의병에 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의병들을 혹독하게 고문하다가 죽게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말의병은 대한제국의 국권을 지키면서 일제 군경과 싸우다가 이름 모를 산골짜기와 들녘에서 목숨을 바쳤다.
2. 산남의진(山南義陣)의 제3대 의병장 최세윤
최세윤ⓒ최세윤의병대장기념사업회
최세윤(崔世允, 1867-1916)은 경북 흥해군(興海郡) 서면(西面) 곡성리(谷城里) 학림동(鶴林洞)에 살았다. 그의 본관은 곡강(曲江), 이명은 최세한(崔世翰), 호는 농고(農皐), 자가 성집(聖執/成執)이다. 일본측 자료에는 주로 최성집으로 기록되어 있다. 1908년 3월 경주경찰분서에서 내부 경무국에 보고한 내용에 의하면, 최세윤의 친족은 흥해군의 소작농으로 대부분 가난하게 생활하였다. 최세윤은 흥해군의 형리(刑吏)와 병방(兵房) 서기로 활동하다가 1896년에 의병에 참여했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소모장(召募將)으로 활동했다고 하나, 의진(義陣)의 소모장으로 활동한 사실이 잘못 전해진 것 같다. 일본 군경은, 그가 의병에 가담하기 전에 농사를 지으며 학교 교사를 지낸 것으로 파악했다.
1895년 후반 명성황후시해사건과 단발령을 기점으로 복수토적(復讎討賊)과 보발론(保髮論)을 표방한 의병이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다. 1896년 1월 그는 장상홍(張相弘), 정래의(鄭來儀) 등과 함께 안동의진에 참여해서 좌익장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던 중 임금의 해산 명령에 따라 의병에 나선 지 반년이 못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최세윤은 학림강당(鶴林講堂)에서 향리의 자제들을 가르치고, 선조인 최천익(崔天翼)의 『농수선생속집(農叟先生續集)』을 간행하며 때를 기다렸다. 한편으로는 흥해를 비롯한 경주 영천 일대 우국지사인 이후(李垕) 조성목(趙性穆) 등과 교유하며 신망을 쌓았다.
을사늑약에 반대하는 여론이 크게 확산되던 1906년 봄 그는 산남의진(山南義陣)을 결성하던 정용기(鄭鏞基)의 요청을 받았다. 마침 병에 걸려 바깥 출입을 하기 어렵던 그는 의병의 모집과 무기 조달 그리고 정보 제공 등 후방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정용기가 체포됨으로써 산남의진은 해산되고 말았다.
부친 정환직(鄭煥直)의 노력으로 석방된 정용기는 1907년 봄 산남의진을 재결성하여 다시 항일투쟁에 나섰다. 10월 이들은 포항 입암(立巖)에서 격전을 벌이다 정용기를 비롯한 40여 명이 전사하였다. 산남의진의 의병장에 추대된 정환직은 서울진공계획을 추진하다가 그해 11월 포항 각전(角田)에서 체포되어 순국하였다.
산남창의지ⓒ영천역사박물관
1908년 3월 최세윤은 흩어진 의병을 수습하여 산남의진의 제3대 의병장을 맡았다. 이들은 흥해⋅청송⋅영덕을 비롯한 경북을 중심으로 활동했는데, 최세윤은 남동대산(南東大山)을 본진으로 삼아 각 부대를 분산 배치하였다. 서종락(徐鍾洛)을 청송 주왕산, 이세기(李世基)를 영천 보현산, 우재룡(禹在龍)을 영천 팔공산, 정순기(鄭純基)를 포항의 북동대산에 배치한 것이다. 그는 이들과 서로 돕는 기각지세(掎角之勢)를 형성하여 유격투쟁으로 일제 군경을 괴롭혔다. 당시 최세윤이 이끄는 본진은 선봉장 백남신(白南信), 중군장 권대진(權大震), 후봉장 최치환(崔致煥), 소모장 박완식(朴完植) 등으로 지휘부를 편성하였다. 이들은 흥해를 비롯한 청하⋅청송⋅영천⋅의성⋅경주⋅영해 등 경상북도 산간과 연해지역을 무대로 항일투쟁을 전개했고, 규모는 대략 100명 내외였다.
최세윤 판결문(대구지방재판소, 1911.11.15)ⓒ국가보훈부
최세윤이 주도한 산남의진은 1908년 3월 25일 흥해 덕산령(德山嶺) 전투에서 중군장과 참모장 등 지휘부를 포함한 의병 12명이 전사하고 8명이 부상을 당하는 등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당시에는 일본 군경이 파견한 밀정과 변장대(變裝隊)에 의해 상당수의 의병들이 체포되거나 피살되는 경우가 많았다. 최세윤의 큰아들 최산두(崔山斗) 역시 이 과정에서 체포되었다. 그는 부친의 소재를 파악하려는 일본 경찰의 집요한 심문에도 함구로 일관하다가 종신형을 선고받아 순국하였다.
한편 최세윤은 일시 잠복하여 일제 군경의 집요한 추적을 피하였다. 행적이 묘연하던 그는 경북 장기군(長鬐郡) 내남면(內南面) 용동(龍洞)에 살다가 1911년경 체포된 것 같다. 1911년 12월 그는 대구공소원에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으나, 얼마 후 5년 3월로 감형되었다. 정부는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체포 직후 그의 심경을 토로한 시 한 수가 전한다.
나라가 깨지고 집이 망한지 이미 여러 해 되었는데
아직도 한 가닥 목숨 남아 있으니 푸른 하늘에 부끄럽네
장부가 이제 죽을 곳을 알았으니
은나라에 백이숙제(伯夷叔齊) 있고, 제나라에 전횡(田橫)이 있었네.
3. 대동창의단(大東倡義團)의 선봉장 정원집
정원집(鄭元執/鄭元集, 1877-1909) 서울 중서(中暑) 전동(磚洞)에 살았다. 그는 대한제국의 군인이었다. 평리원의 판결문에 의하면, 그는 1907년 음력 9월 10일 중서 전동(典洞)에 사는 이봉래(李鳳來)와 함께 경기도 광주(廣州)의 정철하(鄭喆夏) 의진에서 군자금을 조달하는 활동을 벌이다 귀가하였다. 이봉래 역시 정원집과 행동을 같이 하다가 체포되었다. 이들은 내란죄 명목으로 10년 유배형을 받고 전남 지도(智島)로 유배되었다. 당시 이봉래의 직업은 고용(雇傭)이었고, 정원집은 퇴병(退兵), 즉 해산군인이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그들은 군대해산 당시 의병 봉기에 가담했다가 서울을 벗어나 경기도 광주의 정철화 의병에 참여한 것 같다. 판결문에는 정철하라고 기재되어 있으나, 정철화(鄭哲和)가 정확한 이름이다. 정철화는 방인관(方仁寬) 의진 소속으로 활동하였다. 방인관은 서울진공작전을 주도한 13도창의대진소에서 평안도를 대표한 의병장으로, 평안북도 운산 출신으로 금광 광부 출신이었다.
정원집 판결문(평리원, 1907.11.30)ⓒ국가보훈부
정원집과 이봉래는 13도창의대진소의 방인관 의진 소속인 정철화 의병부대에서 일시 활동하다가 귀가한 후 체포되었다. 이들은 1907년 11월 평리원에서 10년 유배형을 받아 다음 달 전남 지도에 유배되었다. 한편, 판결문에 의하면 정철화는 경기도 용인의 유생 출신으로 1907년 음력 7월경 여주에서 방인관(方仁寬) 의진에 가담하여 서기로 활동하며 14명의 의병을 거느렸는데, 정원집과 이봉래도 소속되었을 것이다. 정철화는 음력 9월 15일경 가족을 데리고 서울에서 살다가 1908년 초 일본군 사령부에 체포되었다. 그는 내란죄 명목으로 15년 유배형을 받아 진도로 유배되었다. 그는 1909년 진도의 유배지를 탈출하여 다시 의병으로 활동했으며, 1912년에는 독립의군부에 가담했을 뿐만 아니라 이후에도 일사보국(一死報國)의 신념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한 우국지사였다.
정원집과 이봉래 역시 1908년 후반 10년 유배형 중이던 현재의 신안군 지도를 탈출하여 다시 의병에 투신하였다. 이들은 전라도 서부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항일투쟁을 벌이던 전해산(全海山) 의병부대에 들어가 정원집은 선봉장으로, 이봉래는 종사(從事)로 활동하였다. 전해산의 본명은 기홍(基泓), 자는 수용(垂鏞), 호는 해산(海山)이었다. 그는 전북 임실 출신으로 1907년 음력 9월 진안 마이산(馬耳山)에서 의병을 일으킨 이석용(李錫庸) 의진에 참여하였다. 1908년 봄 그는 전라남도에서 명성이 자자한 김태원 의진에 가담하기 위해 남쪽으로 내려왔다. 하지만 김태원 의병장은 어등산(魚登山)에서 전사한 직후였다.
허탈한 심정의 전해산은 김태원 의진에서 활동한 조경환(曺京煥) 오성술(吳成述) 등을 만나 심기일전하였다. 1908년 중반 그는 대동창의단(大東倡義團)을 결성하여 독자적인 의진을 이끌었다. 이때 정원집과 이봉래는 유배지를 탈출하여 대동창의단의 선봉장과 종사로 각각 참여한 것이다. 이들은 주로 나주⋅영광⋅함평⋅고창 등 전라도 서부지역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당시 전해산은 바다와 산을 누비며 의병항쟁을 펼치겠다는 의미로‘해산(海山)’이라는 이명을 만들어서 본명보다는 전해산으로 널리 알려졌다. 대동창의단의 선봉장으로 활약한 정원집은 정참위(鄭參尉)라 불렸는데, 그가 해산군인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군사 지식을 갖춘 해산군인이었으므로 전해산 의병장은 선봉장의 중책을 맡겼을 것이다. 실제로 정원집은 1908년 후반 나주 석문산(石門山)과 영광 불갑산(佛甲山) 전투 등 여러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전해산ⓒ독립기념관
전해산의 대동창의단은 전라도 서부지역에서 대표적인 의진으로 손꼽혔다. 이들은 일제 군경과의 전투와 일진회를 비롯한 친일세력 및 가짜 의병의 처단 등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일제 군경의 강력한 진압 작전으로 인해 어려운 상황에 처하였다. 이에 전해산 의병장은 심남일(沈南一) 의병장과 함께 호남 각지의 여러 의병부대와 연락하여 호남동의단(湖南同義團)을 결성하였다. 1908년 말 11개 의진이 참여한 호남동의단은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보다 강력한 항일투쟁을 전개할 수 있었다.
당시 전해산 의병장이 배포한 격문에서,“나는 정원집과 더불어 수십여 진을 규합하여 산과 바다를 횡행”한다고 표방한 점만 보더라도 선봉장 정원집의 역할이 지대했음을 알 수 있다. 1909년 1월 하순 정원집은 나주 고막원(古幕院)에 있는 일본군 병참소 공격에 나섰다. 일본군을 섬멸할 뿐만 아니라 다량의 무기를 확보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전투 과정에서 총에 맞아 전사하고 말았다. 정부는 정원집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4. 전라남북도를 오가며 유격전을 펼친 김영백 의병장
김영백(金永伯, 1880-1910)은 전라남도 장성군(長城郡) 북이면(北二面) 달성리(達城里)에 살았다. 의병을 일으키기 전 그의 이력을 찾을 수 없고, 판결문에 그의 직업이 농업으로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다만 그가, “한국이 일본의 보호를 힘입어 정치를 행함은 그 독립을 해치는 것으로 단정하고, 일본인 기타 여러 외국인을 추방하고 정사를 변경하려는 목적”으로 의병을 일으켰다고 밝힌 점이 주목된다. 이를 통해 그가 일본이 강제로 체결한 을사조약에 반대하여 일본인을 비롯한 외세를 내쫓기 위해 의병을 일으켰음을 알 수 있다. 일본이 을사조약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자주성을 상실하게 했으며, 그것을 방조한 외국 세력도 무관하지 않으므로 타도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그의 의병을 일으킨 배경과 목적을 보면 신념이 강한 우국지사였음을 알 수 있다.
1907년 음력 10월 그는 고향인 장성 북이면에서 1천명의 의병을 불러 모아 스스로 의병장에 올랐다. 그는 선봉장 국호남/허경화(麴湖南/許京化), 중군장 강정형/강의관(姜正珩/姜議官), 후군장 심학래(沈學來), 좌익장 고복경(高卜京), 우익장 신성근(申聖根), 행군장 김일주(金一珠), 감독장 오순오(吳順五), 호군장 조성관(趙聖寬), 군량관 변순오(卞順五), 포대장 김경련(金京連), 도통장 최정근(崔正根) 등으로 지휘부를 편성하였다. 그는 1천 명의 의병과 총기 200정을 준비했다. 군자금과 무기와 탄약, 식량과 피복 등을 주민들로부터 거두어 들였다. 1천 명 규모의 부하는 가장 많았을 때이며 신뢰할만한 부하는 약 300명이라고 알려졌다. 일제는 김영백 의병장이 이끄는 의병부대의 규모를 100명 내외로 파악하였다.
「폭도에 관한 건」(전라북도 관찰사, 1909.6.1)ⓒ국가보훈부
이를 기반 삼아 김영백 의병부대는 장성을 비롯한 정읍⋅부안⋅고창⋅순창 등 전라남북도를 넘나들며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판결문에 의하면, 이들은 1908년 음력 3월 일본군 수비대와의 교전을 시작으로 1909년 6월까지 10여 차례 이상 일제 군경과 전투를 벌였다. 대표적인 사례를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1908년 3월(음) 정읍 단곡리(丹谷里)에서 일본군 수비대의 기병을 기습하였고, 7월(음)에는 흥덕 법지(法止) 수비대 보병과 격전을 벌였다. 9월(음)에는 고창의 방장산(方丈山) 백계동(白溪洞)에서, 10월(음)에는 장성 북이면 신기리(新基里)에서, 11월(음)에는 장성 북이면 오현(鰲峴)에서 일제 군경과 교전하였다. 또한, 1909년 1월(음)에는 북이면 상곡리(上谷里), 2월(음)에는 북일면(北一面) 동산리(東山里)와 흥덕 세곡리(細谷里), 4월(음)에는 흥덕 일동면(一東面) 구수교(九水橋), 일남면(一南面) 유점리(鍮店里) 그리고 고부 강고리(江古里) 등에서 각각 전투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전해산과 박도경(朴道京)이 이끄는 의병부대와 연합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1909년 5월 이들은 정읍의 한 산중에서 총기를 제조하다가 일본 헌병대에 발각되어 격전을 벌였다. 이 전투에서 의병 5명이 전사하고, 다량의 무기와 제조 중인 총기 부품 등을 빼앗겼다. 일본인 농장주가 운반 중인 벼 수십 석을 빼앗아 소각하거나 은닉한 바 있으며, 전주(電柱) 등 일본의 통신 시설을 파괴하기도 했다.
김영백 판결문(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 1909.12.20)ⓒ국가보훈부
1909년 9월 일제의 이른바‘남한대토벌작전’이 시작되기 전부터 김영백 의병부대에 대한 탄압이 계속되었다. 국치원(鞠致元)⋅유규상(柳奎相)⋅김재섭(金在燮)⋅변반결(邊班潔)⋅방순명(房順明) 등이 체포되었다. 약 두 달간 실시한‘남한폭도대토벌작전’ 이후에도 김영백 의병장 휘하의 의병 상당수가 체포되었다. 이들은 대체로 일제의 변장대(變裝隊)에 의해 체포되는 경우가 많았다. 김영백 의병장은 한동안 일제 군경의 추적을 따돌리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일제의 탐문이 갈수록 강화되자 1909년 11월 정읍 주둔 수비보병대(혹은 고부헌병분견소)에 자수하였다. 12월 20일 1심 재판에서 교수형을 선고받은 후 1910년 5월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5. 독립의 도화선으로 목숨을 바친 한말의병
일제는 한말의병을“한국의 독립을 안고(安固)하게 만들려고 하는 망상”을 품은 세력으로 인식하였다. 한말의병이 대한제국의 독립을 지키기 위해 일제 군경과 무모한 투쟁을 전개하는 무모한 세력이라는 평가이다. 일제 군경은 한말의병을‘폭도’라고 지칭하며, 불법을 일삼는 강도로 간주하였다. 따라서 일제는 체포된 의병을 ‘내란과 폭동죄’보다 ‘강도와 살인 및 방화죄’로 재판에 회부하여 의병의 불법성과 난폭함을 강조하였다.
산남의진 발상 기념비(경상북도 포항시)ⓒ독립기념관
하지만 실제로 한말의병은 사생취의의 결사보국 정신으로 망국의 위기에 처한 대한제국의 국권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쳤다.
산남의진의 제3대 의병장 최세윤은 향리 가문의 가난한 교사 출신이었으나, 10여 년 동안 나라를 걱정하며 오직 의병의 외길을 걸었다. 해산군인 정원집은 13도창의대진소의 일원으로 정철화 의진에 참여했다가 10년 유배형을 받아 전남 지도에 유배된 유배수였다. 1908년 후반 유배지를 탈출하여 전해산 의병부대에 합류하여 선봉장으로 활동하였다. 유배수 출신인 그는 전라도의 산과 바다를 누비며 의병항쟁을 하겠다고 천명한 전해산 의병부대의 선봉장으로 활약하다 순국하였다.
장성 출신의 김영백 의병장은 주로 고창⋅정읍⋅부안⋅순창 등 전북지역을 넘나들며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다만, 의병을 일으키기 전 그의 행적을 찾을 수 없는 점이 아쉬움을 남긴다. 이와 같이 한말의병은 1896년 초 복수토적(復讎討賊)을 표방한 의병이 봉기한 이래 약 20년 동안 대한제국의 국권을 수호하기 위해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한말의병은 이후 계속되는 전민족적 독립운동의 도화선이었다.
https://e-gonghun.mpva.go.kr/user/IndepCrusaderDetail.do?goTocode=20003&mngNo=10555주소복사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