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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이석영

훈격아이콘 훈격: 애국장
훈격아이콘 서훈년도: 1991년

주요공적

1910년 이회영․이시영 등과 함께 서간도 망명

서간도 지역에 한인 자치기관인 경학사 설립

1911년 신흥무관학교 설립, 독립군 장교 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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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영

이석영 李石榮 ,(1855)~(1934). 서울 서울 , 애국장 1991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의 주춧돌을 놓다

1. 노혁명가의 최후

《동아일보》1934년 2월 28일자 기사에는 독립운동가 이석영의 부고 사실을 다음과 같이 알렸다.

만주와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이석영(李石榮)이 금일(2월 16일) 오후 2시 상해 불조계 아이배로(亞爾培路) 서가고교우(徐家庫僑寓)에서 사망하다.

이석영 선생 부고 기사(동아일보 1934년 2월 28일자)ⓒ국사편찬위원회
이석영 선생 부고 기사(동아일보 1934년 2월 28일자)ⓒ국사편찬위원회

이어 3월 1일자 기사에는, “만주 중국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사망한 이석영의 장례식이 2월 20일 상해에서 거행되었는데 유해는 상해 홍교로(虹橋路) 공동묘지에 안장되다.”는 내용을 전했다.

독립운동 끝에 이역만리 망명지에서 쓸쓸히 삶을 마감한 것도 안타깝지만, 더 가슴을 아프게 하는 것은 80 노구를 이끌고 상하이의 빈민가를 전전하며 두부찌꺼기인 콩비지로 연명하다가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이다. 삼한갑족의 후예로 만여 석의 대자산가로 이름을 날렸던 그가 독립군기지를 개척하기 위해 전 재산을 처분하고 서간도로 망명한 것은 망국 직후인 1910년 12월이었다. 이때 그는 50대 후반 초로에 들어서고 있었다. 잘 알려졌듯이 이석영의 6형제들은 넷째 이회영(1867~1932)의 건의에 따라 일가권속 60여 명을 이끌고 망명을 단행했다. 이들은 오로지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으려는 혈성으로 가문 차원에서 집단 망명한 것이다. 이들 망명에는 이석영의 경제적 뒷받침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서간도에서 일구어 낸 것이 독립운동사에 빛나는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였다. 비록 남의 나라 땅이지만 한인들의 자치 조직을 세워, 독립군 사관을 양성한다는 꿈을 실현했던 것이다. 이는 대한제국 멸망 후 독립전쟁이라는 새로운 방략을 실천한 첫 시도였다. 이석영의 재정적 후원이 없었다면, 그런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가 탄생할 수 없었으리라는 말은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그만큼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의 설립에 이석영의 재정적 지원은 절대적이었다.

이석영 선생 부고 기사(매일신보 1934년 3월 1일자)
이석영 선생 부고 기사(매일신보 1934년 3월 1일자)

그러나 서간도의 망명 생활은 극심한 가뭄으로 흉년이 닥쳐 경학사의 사업이 어려워지고, 신흥학교 설립에 필요한 재정을 쏟아 부으면서 국내에서 가지고 온 그 많던 재산도 얼마가지 못해 바닥나고 말았다. 거기에 풍토병까지 돌아 어린 아이들을 잃는 등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어야 했다. 1913년 국내에 들어갔던 이회영이 광무황제(고종)의 급서 직후 1919년 베이징으로 무대를 옮기자, 이석영 역시 서간도를 떠나 베이징으로 갔다. 서간도에 머무는 동안 60대 중반의 노인이 되어버린 그는 더 이상 독립운동 일선에 나설 수가 없었다. 베이징에 머물렀던 10년 여 동안 그는 끼니조차 잇기 힘든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렸다. 생활이 어렵기는 이회영도 마찬가지였다. 베이징에 올 때 얼마간의 자금을 마련한 덕분에, 한때 이회영의 집에는 독립운동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으나 그 사정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1930년 이회영이 상하이로 거처를 옮길 때 이석영도 상하이로 내려가 빈민가에서 지내다가 그곳에서 한 많은 생을 마쳤다.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이 있듯이, 독립운동은 집안의 희생과 몰락을 각오하고 나서야만 했던 가시밭길이었다. 그러나 그 길을 마다하지 않았던 이석영의 삶과 자취는 독립운동의 정의와 양심이 무엇인가를 역사에 남긴 표상이었다.

2. 삼한갑족의 후예로서 신시대의 가교를 놓다

이석영은 1855년 서울에서 아버지 이유승과 어머니 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호는 수석(漱石)이며, 이명으로 이영(李永)을 사용하기도 했다. 백사 이항복의 후예인 이들 가문은 300여 년 동안 8대에 걸쳐 정승을 배출한 삼한갑족의 명문가였다. 생부 이유승(1835~?)은 이조판서와 우찬성, 궁내부특진관 등을 거쳤으며, 양부 이유원(1814~1888)은 영의정을 지냈으며, 정치적으로 흥선대원군과 맞서 개항을 주장했던 정계의 거물이었다.

이석영은 30세가 되던 1885년 4종숙인 이유원의 양자로 들어가 막대한 전장(田莊)을 상속받았다. 이유원은 경기도 양주 가오실(嘉吾室) 출신으로 전답이 1만여 석에 달했다. 양주에서 서울까지 80리 길을 거치는 동안 남의 땅을 밟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명문자제가 그렇듯이 이석영은 1885년 과거에 급제해 벼슬길로 나섰다. 탄탄대로에 섰던 그는 승지로서 고종을 측근에서 보필하기도 했다. 그러나 1894년 갑오개혁 이후 관직에서 물러나 재야에 머물렀다. 1897년 대한제국 수립 이후 중추원 의관 등이 내려졌으나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그 뒤에도 광무황제(고종)의 부름이 있었지만 정치에 몸을 담지 않았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형제 중에도 가장 신임하던 아우인 우당 이회영이 벼슬길을 마다했던 것과 관련이 있었지 않을까 생각된다. 우당은 평소 ‘벼슬길에 나가서 목숨을 바쳐 시국을 바로 잡고 이도(吏道)를 세울 자신이 있다면 몰라도’, 자신의 명예와 안위를 위해 벼슬길에 나가서는 안 된다는 소신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벼슬길에 나서는 아우 이시영(1869∼1953)을 만류한 일도 있었다. 그는 “온 세계의 지식을 구하고 동지를 모아, 기울어가는 국운을 바로잡고 도탄에 빠진 민생을 구출하는 것”을 시대적 소명으로 받아 들였다.

수구와 개화가 대립하는 당시의 정국 상황도 날카롭게 비판했다. “지금 정치를 하는 사람의 병폐는 두 가지가 있다. 그 하나는 습속에 얽매인 사람들로 시국의 발전을 알지 못해 개혁을 이루지 못하고 옛 것에만 빠져 있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개화에 급급한 사람들로 근저(根柢)를 굳게 갖지 못하고 자기 것만 옳다고 독책(督責)하는 과실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순(因循)과 고식으로 끝내 발전할 기약이 없다”는 것이 우당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고루한 옛 습속을 타파하는 사회 개혁과 함께 서양 문물을 분별 있게 받아들여 사회 발전을 이룩해야 한다는 것이 우당의 신념이었다.

이 무렵 이회영과 동지들의 모임 장소는 다름 아닌 이석영의 집인 남산 홍엽정이었다. 원래 백사 이항복의 집이었던 이곳은 후일 다른 사람에게 팔렸다가, 이석영의 양부 이유원이 다시 사들여 별장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평소 남달리 우애가 깊던 이들 형제는 격의 없이 세상사를 논하면서 의기를 키워 나갈 수 있었다. 후일 이회영이 이석영에게 해외 망명을 건의했던 것도 이런 배경을 바탕으로 가능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1898년 홍엽정 모임에서 우당은 “이제 제왕의 시대는 갔고 사민 자유평등의 시대가 왔으니, 우리의 전통과 습성을 생각하면서 시대 조류에 따라 새나라 건설 이론을 확립해야 한다”고 했다. 혁신적인 우당의 신념과 주장은 자연스럽게 이석영에게도 전달, 공유되었을 것이다.

3. 서간도 망명을 추진하다

6형제 중에서도 이석영과 이회영은 각별한 사이였다. 이석영은,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려는 혁신적인 이회영을 굳게 신임했고, 든든한 후원자의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들 형제 모두가 망명한 것과 관련해 여러 자료 및 기록들에서는 1910년 8, 9월 무렵 형제회의에서 결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간의 연구들에서도 1907년 신민회의 해외독립군기지 개척 계획에 의해 1908년 해외로 나가 블라디보스톡에서 이상설을 만난 뒤 1910년 7, 8월 서간도 답사 이후 1910년 8, 9월 경 형제회의를 통해 해외망명을 결정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회영 선생
이회영 선생

그러나 을사늑약 이후 이회영의 행적을 살필 때, 이들 형제가 추진한 해외 망명의 배경과 과정을 새롭게 살필 필요가 있다. 이석영을 비롯한 이들 형제의 그 많은 재산을 불과 서너 달 만에 처분할 수 있었는지도 의아스럽다. 또 한 번의 회의를 통해 일가권속 60여 명에 대한 망명을 결정했다는 것도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상식적으로 보더라도, 삼한갑족의 후예인 이들 일가가 한마음 한뜻으로 망명을 단행한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망명 계획이나 준비, 결행에 이르기까지, 모든 게 비밀리에 이뤄져야 했으니 그 어려움도 남달랐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 형제는 일사불란하게 험난한 망명길을 성공리에 마칠 수 있었다.

을사늑약을 결사반대하던 이회영은 을사오적처단의 계획을 추진하는 한편 1906년 북간도 용정에 서전서숙을 세우는 일에도 깊게 관여하고, 네덜란드 헤이그 특사 파견의 배후 조정에도 깊숙이 관여했다.

이회영이 헤이그 특사 파견을 막후 조정하는 과정에서 주목할 것은 1906년 봄 해외로 떠나는 이상설(1870~1917)과 함께 북간도에 서전서숙을 설립할 것을 논의한 사실이다. 이 자리에는 이동녕, 여준, 유완무, 장유순 등도 참석했다. 이때 논의된 내용은 한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북간도 용정에 서전서숙을 세워 독립운동의 기지로 삼자는 것이었다. 용정은 일찍부터 한인사회가 발달한 곳이었다. 러시아 연해주와 가깝고 국내와 왕래가 편한 지리적 이점을 지니고 있었다. 헤이그로 향하던 이상설이 1년 여 시간을 용정에 머물며 세운 것이 서전서숙이었다. 흔히 서전서숙을 두고 북간도 최초의 민족교육기관이라 부르지만, 그것의 궁극적 목표는 독립군기지개척이었다. 서전서숙의 설립에는 북간도의 한인사회를 바탕으로 독립군기지를 건설한다는 원대한 포부가 담겨져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서전서숙은 1907년 4월 이상설이 제2차 만국평화회의 특사로 용정을 떠나고, 조선통감부 간도파출소의 탄압, 재정결핍 등으로 1년도 채 안되어 문을 닫고 말았다. 북간도에서는 서전서숙을 계승한 명동학교, 창동학교 등이 독립군 양성의 요람으로 발전해 갔다. 그렇게 볼 때 우당의 독립군기지 개척 계획은 1906년 북간도 용정에 서전서숙을 세울 때 이미 구상됐던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1907년 4월 신민회를 창건할 때 이회영은 상동교회 인사들과 함께 참가하며 해외독립군기지 계획을 구체화시켜 갔다. 신민회는 1907년 7월 광무황제 강제 퇴위, 8월 한국 군대가 강제 해산되는 상황에서 더 이상 언론·교육의 계몽운동 방식으로는 국권을 지키기 어렵다는 판단아래 독립군 양성을 위한 독립군기지개척의 방도를 모색해 갔다. 1910년 3월 신민회는 긴급 간부회의를 통해 독립전쟁의 전략을 채택하고 국외에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독립전쟁에 대비한다는 것과 독립군기지를 건설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백두산 부근에 독립군기지를 개척한다는 계획 아래 기지가 선정되면 국내에서 계획적으로 이주민을 모집하여 집단적으로 이주시켜 한인촌을 건설한다는 것이었다. 토지를 개간 경영하고, 경제적 자립과 자치행정을 실현하고 학교와 교회 등 문화시설을 설치하고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을 창설한다는 계획이었다.

일반적으로 신민회의 독립군기지 개척 계획에 따라 이석영과 이회영 형제들이 서간도로 망명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으나, 서전서숙의 설립 목적이 궁극적으로 독립군기지를 개척하기 위한 것으로 볼 때 우당과 이상설의 해외 독립군기지 개척은 신민회 설립 이전부터 추진되었다고 보는 게 타당할 것 같다.

이회영은 1908년 가을 블라디보스톡에 있는 이상설을 찾아가 독립군기지 건설을 구체적으로 논의했다. 이회영은 비밀리에 블라디보스톡으로 이상설을 찾아가 독립운동 방략을 숙의했다. 이때 이회영과 이상설이 결의한 내용은 1) 지사들을 규합해 국민교육을 장려할 것, 2) 만주에서 광복군을 양성할 것, 3) 비밀단체를 조직할 것, 4) 운동자금을 준비할 것 등이었다. 그리고 중국, 미국, 러시아 등이 일본을 경계하므로 전운이 일어날 때를 기해 조국 광복을 달성하기로 맹세했다. 이때의 계획은 1906년 서전서숙을 세울 때보다 구체적이었으며, 신민회의 전략보다도 실천적인 것이었다. 우당의 독립군기지 개척은 그만큼 선구적이었다. 이 과정에서 군자금 마련과 관련해 든든한 후원자인 형 이석영과 충분히 의견을 나눴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는 사이 1910년 8월 대한제국은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다. 이제 더 이상 독립군기지 개척을 미룰 수가 없었다.

이석영의 재가를 받은 우당은 독립군 기지를 물색하기 위해 서간도 답사에 나섰다. 우당은 이동녕, 장유순, 이관식 등과 옷감 장수 차림으로 꾸미고 초산진을 거쳐 압록강을 건너 안동에서 5백여 리 떨어진 횡도천에 임시 거처를 마련한 뒤 남만주 일대를 시찰하고 독립군기지 터를 물색하고 한 달여 만에 귀국했다. 그리고 1910년 9월 형제들과 최종 뜻을 모은 뒤 수년간에 걸쳐 진행한 망명 계획을 실천에 옮겼다.

이석영이 만여 석 재산과 토지를 모두 방매하고, 형제들도 재산을 처리한 후 이들 6형제는 일가권속 60여 명을 6, 7대로 분산해서 남대문, 용산, 장단 등에서 따로따로 기차를 타고 떠났다. 이들 일행이 압록강을 건넌 것은 12월 30일이었다. 신의주와 안동에는 연락 및 유숙할 곳이 마련돼 있었다. 이들 일행은 1911년 1월 안동을 떠나 7, 8일 만에 횡도천에 도착했다가 얼마를 머문 뒤 2월 목적지인 삼원포 추가가에 도착했다. 삼원포는 통화와 유하에서 백리 정도 떨어져 있는 곳이다. 삼원포란 명칭은 남산, 홍석진, 마록구 등 세 지역에서 흘러나온 물이 합쳐지는 곳이라 붙여졌으며, 삼원보, 삼합포라 불리기도 했다. 삼원포는 이석영 일가가 만주에 와서 처음 자리잡고 경학사와 신흥학교를 세웠던 추가가와는 10리 정도의 거리에 있었다. 추가가란 추(鄒)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라 붙여진 이름이었다. 이석영 일가의 서간도 망명 생활은 이렇게 시작됐다.

4.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를 세우다

서간도라 하면 압록강 너머 중국의 단동, 관전, 환인, 통화, 흥경, 유하, 임강, 장백, 무송 등을 아우르는 지역을 말한다. 이 지역은 원래 청나라와 문화 교류의 창구에 해당하는 곳으로, 조선시대에는 연행사를 비롯해 청나라와 국경 무역이 활발한 곳이었다. 그러나 17세기 후반 청나라가 실시한 ‘봉금정책’으로 인해 200여 년 동안 사람이 살지 못하는 구역으로 묶여 있다가 1860년대 이래 한인의 이주가 시작됐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고구려의 땅으로 그 자취가 남겨져 있는 관계로 한국인들에게 전연 낯선 곳은 아니기도 했다.

이들은 삼원포에 일단 정착한 후 향후 실행 방침을 논의하기 위해 1911년 4월 추가가 마을 뒤편 대고산에서 3백여 명이 모인 가운데 노천대회를 열었다. 이 대회에서 결의된 실행 방침은 먼저 민단적 자치기관으로 경학사를 조직할 것과 ‘기성군인과 군관을 재훈련해 기간장교로 삼고 애국청년을 수용해 국가의 동량인재를 육성할 것’ 등의 내용이었다.

경학사(耕學社)란 이름은 농사하며 공부하자는 뜻에서 지어진 것이었다. 여기에서 공부란 단지 지식을 익히는 것에 그치지 않고 독립군을 양성한다는 뜻도 담겨져 있었다. 그런 의지는 “경학사 취지문”에서 무장투쟁으로 독립을 쟁취하겠다는 내용에서도 확인된다. 경학사의 사장은 이상룡, 재무부장은 이동녕, 교무부장 유인식, 농무부장 장유순, 그리고 우당이 내무부장을 맡았다. 경학사는 한인사회를 총괄하는 지위에 있었으며, 그 살림을 우당이 맡은 것이다. 그러나 경학사는 1911년과 1912년 연이은 대흉년으로 심각한 재정난에 부딪히며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런 가운데도 신흥학교를 세우는 사업은 계속됐다. 무엇보다 학교 부지를 구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신변 보호를 위해 중국 국적을 취득하는 입적도 필요했다. 그러나 주변 중국인들의 의심과 경계가 워낙 심했다. 대규모의 한인들이 몰려오자, 중국인들은 자신들의 땅을 빼앗으려는 일본의 앞잡이거나 밀정으로 의심한 것이다.

이회영은 12월 베이징으로 가서 총리대신 원세개를 만났다. 원세개와 이석영 일가의 인연은 1882년 임오군란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원세개는 청국 군대의 군수참모라는 자격으로 조선에 왔다. 조선에 머무는 동안 원세개는 오만방자한 태도로 모두의 원성을 샀다. 심지어 조선의 국왕에게 무례한 언행도 일삼았다. 그렇지만 원세개의 상관인 이홍장과 이석영의 양부인 이유원, 부친 이유승 등이 가까웠던 관계로 원세개와도 교류가 이어지고 있었다. 원세개가 동삼성 총독과의 만남을 주선해 주면서 토지 구입과 입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신흥학교 설립에 필요한 경비는 이석영이 기부한 자금으로 충당했으며, 둔전제 방식의 도입과 자치조직도 중요한 기반이 됐다. 합니하(哈泥河)는 지리적으로 중국인이 별로 살지 않아 마찰도 없었고, 군사훈련을 시키기 위해 적합한 조건을 지니고 있었다.

신흥학교는 1911년 6월 추가가 마을의 허름한 옥수수 창고에서 개교식을 가졌다. 이때 신흥학교의 공식 명칭은 ‘신흥강습소’였다. 신흥이란 나라를 새롭게 일으킨다는 뜻을 지녔고, 강습소라 이름한 것은 중국 당국의 감시와 일제의 탄압을 피하기 위한 방편이었을 뿐 실제로는 군사훈련을 통한 독립군 사관 양성이 주된 교육 내용이었다.

신흥학교의 첫 학생은 40여 명 정도였다. 학생들은 학비를 내지 않았으며, 학교 유지비와 식사는 학생들이 공동으로 마련한 것을 포함해 부담했다. 멀리서 오거나 다른 지방에서 온 학생들은 주로 독립운동가들의 집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그래서 이석영을 비롯한 이회영, 이시영 형제의 집에는 많은 학생들이 머물렀다. 흉년이 겹쳐 생활이 어려운 중에서 학생들은 노동을 해 비용을 부담했다. 새 교사를 신축할 때도 학생들이 흙을 고르고, 돌을 날라 노동으로 역할을 맡았다.

신흥학교는 1년 후 합니하에 새로운 부지를 마련해, 1912년 3월 공사를 시작해 강당과 교무실을 비롯해 내무반·사무실·숙직실·식당 등 무관학교로서 격식을 갖춘 교사를 지을 수 있었다. 18개의 교실이 산허리를 따라 큰 병영사처럼 세워졌다. 학년별로 강당과 교무실이 마련되고, 내무반 내부에는 사무실, 숙직실, 편집실, 나팔반, 식당, 취사장, 비품실 등이 갖추어졌다. 복도에는 생도들의 성명이 부착된 총가가 설치되었다. 이렇게 완비한 건물이 완성되자, 7월에 100여 명이 모여 성대하게 낙성식을 가졌다.

이 무렵 서간도에 이주한 한인들의 수는 2만여 명에 달했다. 한인들이 많이 살았던 곳은 통화현을 비롯해 관전현, 환인현, 집안현, 임강현 등지였다. 이들의 이주는 첫째 일본이 가혹한 통치를 피해 피난한 것, 둘째 빈곤을 이겨내기 위해 농업 이민한 사례, 셋째 정치적 망명, 넷째 중국에 의지하기 위한 것 등이었다. 만주지역이 부여, 고구려, 발해의 터전이었던 점도 역사적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만주가 부여, 고구려, 발해의 옛 땅이고 단군의 혈통을 이어받았다고 주장한 것은 민족정신을 고취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었다. 만주는 한국인이 살아가야 할 땅이었고, 독립군의 기지였던 때문이다.

신흥강습소는 1912년 신흥학교로 개편되면서 이석영이 교장을 맡았다. 타고난 성품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꺼려했지만, 신흥학교가 세워지기까지 이석영의 공이 워낙 지대했으므로 주변의 권유를 물리칠 수 없어 맡은 것이었다. 이석영이 독립운동에서 직함을 가진 것은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당시 신흥학교는 본과와 특과의 두 과정이 있었다. 본과는 중학과정으로 4년, 특과는 군사학을 가르치는 과정으로 6개월, 3개월 속성과였다. 본과 교사는 장도순과 윤기섭, 이규봉 등이 맡고, 특과에는 대한제국 무관학교 출신인 이관직, 이장녕, 김창환 등이 배치됐다.

본과의 교과로는 국문·역사·지리·수학·수신·외국어·창가·박물학·물리학·화학·도화·체조 등이 편성됐다. 특과에는 보병, 기병, 포병, 공병 등을 위한 훈련 및 총검술, 유술, 격검, 전략 전술, 축성학 등을 가르쳤다. 또한 언덕을 오르내리면서 공격전, 방어전, 도강, 상륙 작전 등 실전 연습도 포함되어 있었다. 또 체육 시간에는 엄동설한에도 불구하고 야간에 파저강 70리 강행군을 비롯해 빙상운동, 대운동, 축구, 목판, 철봉 등을 통해 신체를 단련했다. 이처럼 신흥학교는 일반 교육과 군사 훈련을 병행했다.

백서농장에서 영농하는 신흥무관학교 교사와 학생들ⓒ독립기념관
백서농장에서 영농하는 신흥무관학교 교사와 학생들ⓒ독립기념관

신흥학교 생도들은 새벽 6시 기상나팔 소리가 울리면 3분 이내 복장을 차려입고 검사장에 뛰어 나가 인원 검사를 받은 다음 보건체조를 했다. 체조 후 청소와 세면을 마치면 각 내무반별로 나팔소리에 맞춰 식탁에 둘러 앉아 식사를 했다. 주식은 좁쌀이었다. 반찬은 콩자반 하나였다. 그래도 학생들은 주린 배를 움켜 쥐고 훈련에 열중했다. 식사가 끝나면 애국가 제창과 함께 조례를 가졌다.

그런 노력 끝에 1911년 12월 제1기생으로 40여 명이 속성 졸업할 수 있었다. 1912년 1월에는 학교 연종시험과 진급포상회가 열리기도 했다. 이때 본과 학생 중 반장과 우등자 5명, 소학과 학생 중 반장과 우등자 4명이 포상을 받았다. 그리고 1912년 가을에는 특과생으로 변영태, 이규봉, 성주식 등 11명이 졸업했다.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은 졸업 후 2년 간 의무적으로 신흥무관학교에 복무해야 했는데, 이들이 각처에 세운 소학교와 중학교가 30여 개에 이르렀다.

신흥학교의 교육목표 및 사명은 학생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정신 교육을 통해 살필 수 있다. 신흥학교는 나라를 찾는다는 사명 정신으로 1) 불의에 항거하는 정신, 2) 임무에 희생하는 정신, 3) 체련에 필승 정신, 4) 간난에 인내하는 정신, 5) 사물에 염결하는 정신, 6) 건설에 창의하는 정신 등을 좌우명으로 삼았다.

그러나 1913년 3월 일제가 이회영을 비롯해 이동녕, 이시영, 장유순, 김형선 등을 암살하기 위해 형사대를 급파했다는 연락을 받고, 이동녕이 이상설이 있는 블라디보스톡으로 가고, 이시영은 봉천으로 피신했다. 이때 이회영은 위험을 무릅쓰고 군자금 모집을 위해 비밀리에 국내로 들어왔다.

신흥학교는 1911년 독립군 양성을 위해 이석영이 주춧돌을 놓은 이래 1920년까지 3,5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이들은 3·1운동 이후 만주에서 조직된 독립군의 근간을 이루며 혁혁한 전과를 세우면서 독립전쟁사에서 찬란한 자취를 남겼다.

5. 독립군사에서 가려진 재정적 문제들

이석영의 독립운동과 관련해 짚고 넘어갈 것이 독립운동과 재정적 문제이다. 독립운동에서 재정적 기반은 사람 못지않게 중요한 선결 과제였다. 독립군과 같은 무장투쟁에서는 특히나 그랬다. 독립군도 싸우기 위해서는 먹어야 하고, 자고, 입고 또 무기가 필요했다. 그러나 언제든지 독립군의 재정적 문제는 쉽게 해결되지 못했다. 어쩌면 독립군의 재정문제는 일본군과 싸우는 것보다 더 힘든 고난과 시련이었을지 모른다. 가슴 아픈 일이지만, 독립군 가운데는 재정적 문제로 해산하는 경우도 있었다.

1920년대 기준으로, 독립군 1인의 생활 경비는 한 달에 최소 15원 정도 들어야 했다. 100명의 독립군이면 한 달에 1,500원, 1년이면 15,000원의 군자금이 필요했다. 이 무렵 쌀 한 가마니가 대략 15원이었으니, 독립군 100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1년에 1천 석의 비용이 들어야 했다. 거기에 무기 구입 등의 비용을 보태면, 100여 명의 독립군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1년에 수 천석이라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다.

독립군사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전투에 앞서 군자금 확보는 생존의 전제가 됐다. 군자금을 마련하지 못해 독립군 조직이 해산되는 경우는 그런 사실을 잘 말해 주고 있다.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을 보더라도 북간도 한인사회의 전폭적 지원을 받았지만, 그것으로 모자라 함경도 일대에 국내 지단을 설치하고 수백여 명의 단원이 독립전쟁에 필요한 인적, 물적 기반을 제공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그만큼 독립운동에서 재정적 기반은 절박한 현실의 문제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보더라도, 1919년 5월 도산 안창호가 미주에서 2만 5천 달러를 가져오면서 비로소 가동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독립전쟁은 독립운동의 최고의 방법과 전략이었다. 1920년 전후 서·북간도와 연해주에는 50여 개의 독립군 단체가 활동하고, 독립군의 병력도 1만 여명에 달했다. 1907년 군대해산 당시 대한제국의 군인은 고작 7천여 명에 불과했다. 그래서 일제 침략에 맞서 제대로 싸우지도 못한 채 무너져 갔던 것이 대한제국의 현실이었다. 그러나 3·1운동 직후 1만 여명의 독립군이 생겨나며 독립전쟁을 전개해 갔던 것이다. 이들은 모두가 순수 민병(民兵)이었다. 자발적으로 독립군에 나선 이들은 무기를 비롯해 생활까지 스스로 해결하면서 독립전쟁을 벌여 나갔다. 이것이 진정한 한국 독립운동의 힘이었다. 독립군 양성의 초석이 됐던 이석영의 독립운동은 그래서 더욱 빛나는 것이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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