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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강혜원

훈격아이콘 훈격: 애국장
훈격아이콘 서훈년도: 1995년

주요공적

1919년 신한부인회 결성, 대한여자애국단 초대 단장

대한민국임시정부 등에 독립운동자금 후원

1940년 대한여자애국단 제8대 총단장

공훈전자사료관 이달의 독립운동가 콘텐츠 심볼

강혜원

강혜원 康蕙園 ,1885.11.21~1982.05.31. 평안남도 평양 , 애국장 1995

일찍이 하와이로 건너가 한인부인회를 조직했고, 이후 미 본토로 이주하여 각지에 설립된 부인운동단체를 통합하고 대한여자애국단을 창립했다. 애국단 초대 단장을 역임하며 한인사회 부인운동을 이끌며 ‘미주 한인사회 부인운동의 개척자’로 일컬어졌다. 바느질 등으로 번 돈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미주 대한인국민회 등에 독립운동 자금을 후원했다. 시간당 15센트를 벌면서도 자신과 대한여자애국단에서 후원한 독립운동자금은 총 4만 6천여 달러에 이르렀다.

1. 국내의 삶과 하와이 이주과정

강혜원 선생은 평남 평양(平壤) 성내에서 아버지 강익보(康翊普)와 어머니 황마리아(1863~1937) 사이에서 맏딸로 태어났다. 1922년 10월 9일 선생이 직접 작성한 「흥사단 입단 이력서」에는 기원(紀元) 4218년 11월 21일, 즉 1885년 11월 21일 출생했다고 되어 있다. 2남 1녀 중 맏딸이었던 선생 밑으로는 남동생 둘이 있었다. 장남은 강영승(康永昇)이고 막내는 강영옥(康永玉)이었다.

아버지는 한말 고위 관료였고, 어머니는 평양 외성에 살던 양반 가문의 황마리아였다. 아버지가 고위 관료인 탓에 “어려서는 풍족하게 살았”다. 장남 영승 역시 “생활은 늘 풍족하여 남부럽지 않게 지냈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당시 “돈푼이나 넉넉하다고 기생과 놀고 이곳저곳 나가 있는 날이 많았고, 집안일에 여러 해 소홀해 어머님이 무척이나 애를 태우”셨다고 한다.

8살 즈음인 1893년까지 평양에 살다가 평양 남서쪽에 위치한 증산(甑山)으로 이주하여 1902년까지 10년 남짓 살았다. 어릴 적 서당에서 공부하고 이후 기숙사에 들어가 공부를 했다 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기생과 함께 살며 집안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

이에 어머니는 “강가(康家)에게 시집을 잘못 왔다”며 한탄을 거듭했다. 마침내 어머니는 “나는 더 이상 이런 환경에서는 살고 싶지 않다”고 말하며 자녀들에게 “너희들을 공부시키기 위해 미국에 가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며 미국행을 결심했다.

하와이 이민은 1902년 11월부터 추진되어 일제가 이민을 금지시킨 1905년 7월경까지 이뤄졌다. 대한제국정부는 알렌의 건의로 하와이 이민을 승인하고 이민담당기관인 유민원(綏民院)을 설치했다. 이민 업무는 미국인 데쉴러가 설립한 동서개발회사가 독점했다. 동서개발회사는 인천에 본부를 두고 원산·진남포·목포·부산 등 개항장에 지점을 설치하고 신문광고, 항구와 대도시 등지에 광고를 하며 이민자를 모집했다. 또한 기독교 선교사 등을 통해 이민을 권유하기도 했다. 선교사들을 통해 미국의 발전된 모습을 전해들은 한인들은 “미국을 한국의 희망”이자 “평화와 풍요의 안식처”로 인식했다. 이러한 동경심으로 1902년 12월부터 1905년 7월까지 7천여 명의 한인이 하와이로 이주했다. 당시 한글판 하와이 이민 모집 광고를 보면 “하와이 군도는 누구든지 일신(一身)이나 혹 권속(眷屬-가족)을 데리고 와서 정착하고자 간절히 원하는 자에게 편리함을 공급”한다고 하면서 “모든 섬에 다 학교가 있어 영문을 가르치며 학비를 받지 아니함”이라고 했다.

이러한 소식을 접한 황마리아는 남편과 상의하지 않은 채 단독으로 당시 평양에 나와 있던 하와이 이민을 담당한 관리들과 접촉하여 하와이 이민 수속을 마쳤다. 그리고는 자녀들에게 “너희들은 이곳에서 지내니 보다 공부나 하는 것이 좋겠다. 아버지는 생활이 저러니 가서 맘껏 새 세상에서 공부나 하며 살아보자”고 했다. 이어 남편에게 “우리는 하와이로 떠나간다”고 통보했다.

이어 어머니는 장남의 혼인을 서둘렀다. 장남을 혼인시킨 뒤 함께 하와이로 건너갈 생각이었다. 영승은 중매 끝에 영유골 출신의 강원신(康元信)과 혼인했다. 결혼 당시 강영승은 17세, 신부는 한 살 많은 18세이었다.

강원신·황마리아·강혜원 선생
강원신·황마리아·강혜원 선생

1905년 5월경 강혜원은 어머니를 비롯하여 장남 부부. 7세의 막내동생 영옥과 함께 평양을 떠났다. 이들은 평양에서 남서쪽에 위치한 진남포로 갔다. 진남포는 이민을 담당한 동서개발회사 지점이 있는 곳이었다. 진남포에서 강혜원 가족은 평남 증산 출신의 강명화(姜明化)와 그의 장남 강영대(姜永大) 부부, 차남 강영소(姜永韶) 부부, 막내 강영각(姜永珏), 그리고 증산 출신의 백일규(白一圭) 등과 만나 여관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이튿날 아침 이들은 진남포에서 ‘청룡환’이라는 화륜선(火輪船)을 타고 제물포와 부산항을 거쳐 일본 고베(神戶)에 도착했다.

고베 도착후 그곳에서 통역으로 일하던 송종익(宋鍾翊)을 만나 안내를 받으며 자격 심사를 받았다. 하와이 이민시 노동이민자로 신청한 사람은 남동생 강영승이었다. 그런데 그의 나이가 당시 17세였으므로 이민국에서는 너무 어리므로 노동이민을 하기에는 부적합하다는 판정을 내렸다. 이때 어머니가 이민 담당 직원에게 함께 강명화가 삼촌이라고 둘러대며 함께 이민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아마도 발음이 같은 강(Kang)씨라는 점을 이용한 순간적 기지였다. 이러한 기지로 1차 관문은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어 실시된 신체검사에서 강영승의 시력이 나빠 재차 문제가 되었다. 이 때문에 강혜원 가족은 고베에 남았고, 동행했던 강명화 등 다른 이민자들은 먼저 하와이로 출발했다. 이에 어머니는 이민 직원에게 싸가지고 가려던 한국 비단을 주고 무마하고는 이민선에 올랐다. 이러한 위기 끝에 강혜원과 가족들은 1905년 6월 13일 도릭(Doric) 선편으로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선생 나이 20세였다.

2. 하와이에서의 노동생활

강혜원과 가족은 하와이 도착했을 때, 하와이를 미국이라고 생각했다. 이민 모집 광고에 ‘대 미국 하와이 정부’라는 문구는 이들로 하여금 하와이가 곧 미국(America)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또한 광고 문구대로 모든 교육은 무료라고 생각했다. 이 때문에 미국으로 건너가면 곧바로 학교를 다닐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사탕농장 노동자로 팔려간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이민 당시 이민자들의 돈이 없다는 점을 고려하여 이민회사에서 미리 돈을 내주고 이를 노동으로 갚아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다. 이른바 전대금(前貸金) 제도였다. 전대금 제도는 불법이었지만 이민 당시 암암리에 행해졌다. 따라서 이 돈을 갚기 전에는 농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이러한 사실을 채 알지 못했던 것이다.

하와이에 도착하자마자 강혜원과 가족은 키파훌루(Kipahulu) 사탕농장에 배치되었다. 하와이 군도(群島)는 하와이, 마우이, 카우아이, 오아후 섬 등으로 8개 도서(島嶼)로 이루어져 있는데, 키파훌루 농장은 마우이 섬이 위치해 있었다. 1905년 초 당시 키파훌루 농장에 배치된 한인노동자는 21명으로 전체 노동자의 10%에 해당했다. 하와이 사탕농장주들은 각국 노동자를 관리하기 위해 민족별로 캠프를 설치하여 분리 고립시켰다. 이에 따라 강혜원과 가족은 농장에서 제공한 한인 캠프에 짐을 풀었다. 그리고는 다음 날부터 사탕농장에 나가 일해야만 했다. 사탕농장에서 나가 일한 사람은 어머니와 장남 부부였다. 사탕농장의 주된 일은 개간, 종묘 심기, 김매기, 밭에 물대기(灌漑), 사탕수수 베기와 운반 등으로 고된 중노동이었다. 이 때문에 강혜원과 가족은 많은 눈물을 흘렸다.

어머니와 장남 부부가 일을 나가면 선생은 캠프에서 막내동생을 돌보며 살림을 했다. 물 기르고, 땔감 하고, 음식을 장만하는 등의 일이 하루 일과였다. 이렇게 가족이 하루종일 일하며 번 돈은 한 달에 50달러 정도였다. 이 돈으로는 먹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이즈음 근처의 하와이 원주민의 인도로 이들 가족은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교회에 다니면서 강혜원은 세례를 받았고, 세례명은 ‘세라(Sarah)’였다. 이때부터 ‘강세라’라는 이름으로 불리웠다.

그후 강혜원 가족은 오아후 섬에 위치한 호놀룰루로 이주했다. 이들이 노동가치가 없다는 판단 하에 농장을 감독하던 보스(boss)가 이들을 이주시킨 것이었다. 이때 강혜원 가족은 선박회사에서 미리 지불한 전대금을 갚고 자유의 몸이 되었다. 에와(Ewa) 농장으로 이주하자, 그곳에는 강영소 형제 등을 만났다. 도시로 나온 선생은 학교에 다닐 결심을 했다. 그러나 돈이 한 푼도 없는 상태라 형편상 삯바느질을 시작했다. 어머니와 올케는 빨래를 했다. 삯바느질은 셔츠 한 벌에 25센트를 받았고, 빨래는 한 벌에 5센트를 받았다. 빨래감이 들어오면 손으로 빨래를 한 뒤, 헤어진 부분을 꿰매고 다림질까지 했다. 어머니의 손에서는 피가 날 정도였다. 이렇게 번 돈으로 마침내 기숙사가 있는 만노아벨리여학교(seminary boarding school)에 입학했다. 그러나 수업료가 연간 50달러인데다가 알파벳도 제대로 몰랐기 때문에 2년 정도 학교를 다니다가 그만두었다.

이후 강혜원과 가족들은 논의 끝에 장남의 교육에 집중하기로 했다. 어머니와 올케와 함께 세 여성은 새벽부터 밤까지 일하며 10년간 강영승의 학자금을 벌기 위해 갖은 고생을 했다. 특히 올케 강원신은 10년간 남편을 보지도 못한 채 뒷바라지했다.

1913년 4월 어머니와 함께 호놀룰루 대한인부인회를 조직하면서 한인부인운동을 시작했다. 같은 해 9월에는 호놀룰루 대한인부인회 회장으로서 회무를 확장하여 부인회를 중심으로 재봉소를 설치하고 남녀 의복을 판매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를 위해 스스로 전도위원을 자청했다. 호놀룰루 부인회는 4개 부인회가 통합한 단체로 선생이 회장이 되면서 본격 활동을 했다. 이 부인회에서 어머니도 함께 활동했다. 선생의 부인회 활동의 시작이었다.

그후 동생처럼 지냈던 강영소가 김성권(金聲權)을 소개시켜 주면서 혼담이 오갔다. 김성권은 일본 유학생 출신으로 한학자이자 문필가였다. 1904년 29세의 늦은 나이로 하와이로 건너와 에와농장에서 강영소와 함께 일하며 친구가 되었다. 1907년 하와이 한인단체가 통합하여 한인합성협회를 결성하자, 합성협회 총무로도 일했고, 1909년 합성협회와 북미의 공립협회(共立協會)가 통합하여 국민회를 창립할 때 강영소 등과 함께 하와이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08년 신병 치료차 미주로 이주했고, 혼담이 오갈 당시에는 당시 캘리포니아주 롬폭(Lompoc)에서 일했다. 롬폭은 샌프란시스코에서 470여 ㎞ 떨어진 곳이었다.

이때 강혜원은 결혼을 할 생각이 없었다. “어렵게 미국에 와서 공부도 안하고 덜렁 결혼만 하면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김성권이 공부를 시켜줄테니 결혼하자고 요청했다. 공부를 할 수 있다는 마음에 어머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선생은 결혼을 결심했다.

1913년 10월 25일 토요일 사이베리아 호를 타고 하와이를 출발하여 샌프란시스코로 건너와 1주일간 머물렀다.

3. 미주에서 펼친 한인 부인운동

강혜원 선생 결혼 사진. 선생은 1913년 12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이대위 목사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다.
강혜원 선생 결혼 사진. 선생은 1913년 12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이대위 목사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다.

1913년 12월 9일 샌프란시스코 한인교회에서 이대위(李大爲) 목사의 주례로 열 살 많은 김성권과 결혼했다. 결혼 당시 남편은 38세, 선생은 28세였다. 결혼 당시 미주 한인 신문에는 ‘강세라’로 소개되었다. 결혼과 동시에 선생은 미국 풍습대로 남편 성을 따라 ‘김혜원’으로 성이 바뀌었다.

결혼 초기 남편은 롬폭의 한 농장에서 일을 했고, 선생은 바느질을 하며 집안 일을 했다. 바느질과 자수에 특별한 재능이 있어 수건이나 옷을 만들어 생계를 이었다. 그러나 1914년 장마로 인해 농장이 피해를 입었다. 이에 일자리를 찾아 남편과 함께 샌프란시스코, 그리고 다시 다뉴바로 이주했다. 당시 다뉴바는 포도농장이 많아 한인들이 농장 노동자로 많은 모이던 곳이었다. 다뉴바에서 노동 주선을 하던 한시대(韓始大)의 도움으로 남편은 포도따는 일과 상점 서기 등으로 일했다. 그 사이 세 아이를 낳았다. 그러나 아이들 끼니도 제대로 챙기지 못할 정도도 생활은 힘들었다. 게다가 남편은 선비 타입이라 육체노동 일에 적응하지 못하고 힘들어했다.

다뉴바에서 5년 남짓 지났을 때, 국내에서 3.1운동이 소식이 들려왔다. 이때 “3.1만세 후 많은 여성들이 조국에서 희생되었다는 것을 전해듣고는 우리 미주 여성도 가만히 있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했다. 이즈음 미주 한인의 최고기관인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 안창호(安昌浩)가 3.1운동과 임시정부 후원을 위해 미주 각지의 한인사회를 순방했다. 안창호가 다뉴바를 방문하면서 선생과 만남이 이루어졌다. 이때 안창호가 선생에게 ‘여성들도 조국의 광복을 위해 무언가 해야 하지 않느냐’고 조언했다. 이를 계기로 1919년 3월 25일부터 30일까지 올케 강원신을 비롯하여 한성선(韓成善, 본명 文成善), 한영숙(韓永淑), 한신애(韓信愛), 김경애 등과 1주일 동안 협의한 끝에 신한부인회(新韓婦人會)를 조직하고 자신은 총무로 선임되었다. 신한부인회의 설립 목적은 자녀와 동포들의 자유정신 고취, 한국 후원, 대한인국민회에 의무금 납부 등이었다.

한편, 이보다 며칠 앞선 3월 하순 새크라멘토의 한인부인회(韓人婦人會, 1914년 조직)와 맨티카 여자전도회(1917년 3월 조직)는 4월 하순에 ‘부인애국단’을 조직하기로 합의하고 로스앤젤레스의 부인친애회(婦人親愛會, 1917년 11월 조직)에 발기문을 보냈다. 이러한 논의가 진행되자, 선생이 활동하고 있던 신한부인회와 새크라멘토의 한인부인회는 5월 18일 미주 각 지방에 흩어진 부인회의 통합을 촉구하는 통고문을 발표했다. 8월 2일 신한부인회를 비롯하여 로스앤젤레스의 부인친애회, 새크라멘토의 한인부인회, 샌프란시스코의 한국부인회, 윌로우스지방부인회 대표들이 다뉴바의 한인장로교회에 모여 합동발기대회를 개최하고 합동결의안을 통과시켰다. 합동결의안은 각 지방에 분립된 부인회를 하나로 통합하여 역량을 집중하고, 미주 한인 여성의 통일기관인 대한여자애국단을 설립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대한여자애국단(大韓女子愛國團, the Korean Patriotic Women's Association)이 창립되고, 8월 5일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의 인준을 받았다.

미주 대한여자애국단. 오른쪽에서 세번째가 강혜원 선생)
미주 대한여자애국단. 오른쪽에서 세번째가 강혜원 선생)

대한여자애국단은 대한인국민회 후원, 독립운동자금 제공, 한인 구제사업, 일본상품 배척, 한인부녀자의 독립사상 고취 등을 목적으로 삼았다. 그후 이들은 각 지부를 총괄할 총부(總部)를 설립하기 위해 노력하다가 9월 말경 대한여자애국단 총부를 조직했다. 이때 선생은 대한여자애국단 총단장과 함께 총부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대한여자애국단은 안창호가 산파역을 했으며, 송종익, 홍언, 백일규 등이 많은 도움을 주었다 한다.

1920년 2월 대한여자애국단 초대 총단장으로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를 통해 군자금 500달러를 임시정부에 전달했다. 3월 다시 총단장으로 재선되었다. 그해 4월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장 강영소가 선생에게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의 재정 후원을 부탁하자, 선생은 대한여자애국단 총단장 명의로 「대한여자에게 고함」이라는 글을 발표하고 의연금을 모집했다. 1921년 4월 28일 대한여자애국단 총부 위원들과 함께 「여자애국단 경고서」를 발표하고 단비(團費) 수납을 촉구했다. 선생은 시간당 15센트씩 벌면서도 매월 3달러씩 단비(團費)를 냈다고 한다. 이렇게 모은 돈으로 선생을 비롯한 대한여자애국단 단원들은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후원금을 송금했다. 이외에도 대한인국민회, 한인 자녀들의 국어교육, 한인교회에도 재정을 후원하였다. 또한 국내에서 한재(旱災)와 수재(水災) 등이 일어나면 그때마다 구제금을 보냈다. 그러던 중, 7월 31일 속병으로 프레스노병원에 수술을 받았다. 1922년 대한여자애국단 총부 선거에서 임성실과 함께 총부 위원으로 선임되었고, 10월경에는 흥사단(興士團)에 입단하여 단우(團友)가 되었다. 흥사단 가입은 남편의 영향이 컸다. 남편은 다른 단체에는 가입하지 않았으나, ‘흥사단 맨’으로 통할 정도로 흥사단 일에는 열심이었다.

1923년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했고, 1925년 다시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하여 정착했다. 이즈음에도 바느질로 생계를 꾸려나가는 한편, 대한여자애국단의 사업과 흥사단과 대한인국민회의 민족운동을 적극 후원했다. 1926년 2월에는 대한여자애국단 로스앤젤레스지부 부단장이 되었고, 3월에는 대한인국민회 로스앤젤레스지방회에서 개최한 3.1절기념식에서 남편은 국가와 민족을 위한 기도를, 선생은 독립선언가를 독창했다. 1928년 3월에도 대한여자애국단 로스앤젤레스지부 부단장으로 선임되었고, 1929년 12월에는 한인2세를 위한 국어교육기관을 조직하고 국어교육을 실시할 목적으로 한인아동교육기관 기성발기위원이 되었다.

1930년 12월 로스앤젤레스 한인여자청년회 회장, 1931년 2월 대한여자애국단 로스앤젤레스지부 단장과 위원, 1932년 1월 대한인국민회 로스앤젤레스지방회 주최의 국민회 창립기념식 경축위원 중 연극부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같은 해 5월 심장병이 발병하여 4~5개월간 투병생활을 했다. 1933년 대한여애국단 총부가 샌프란시스코에서 로스앤젤레스로 이전하자, 총부 위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고, 1936~1937년에도 총부 위원으로 활동했다. 1937년 11월 로스앤젤레스한인여자청년회 구제원이 되었고, 1938년 4월에는 대한인국민회총회관 낙성식에 대한여자애국단 총부 대표로 참석했다. 같은 해 11월 당시 로스앤젤레스대한여자기독청년회 회장, 12월 대한여자애국단 로스앤젤레스지부 위원으로 활동했다. 1939년 10월경 중국 장제스(蔣介石)의 부인 쑹메이링(宋美齡)이 재미 중국인에게 솜옷 의연을 모집케 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대한여자애국단에서 솜옷 의연 모집하기로 결정하자, 수전위원(收錢委員)으로서 솜옷과 함께 군자금을 모집하여 쑹메이링에게 보냈다. 그때마다 쑹메이링은 선생에게 감사의 편지를 보냈다.

1940년 1월, 1941년 2월, 1941년 12월 대한여자애국단 총부 단장으로 선임되어 3년간 활동했다. 1941년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 국방과에서 대한여자애국단 총단장인 선생에게 미국적십자회 후원 공작을 위임하자, 그해 12월 전시특연금과 회원을 모집했다. 1944년 1월에는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에서 임시회의를 열고 군사운동 후원을 할 목적으로 민족혁명당 미주지부 5명, 학생회 5명, 대한여자애국단 5명을 대표로 선출하여 대한인국민회 대표 10명과 연합하기로 했다. 이때 대한여자애국단 대표로 선출되었다. 이처럼 선생은 임시정부와 대한인국민회의 재정을 적극 원조하는 한편, 미주내 한인 동포 자녀들을 대상으로 민족교육운동을 실시하는 등 독립운동에 평생을 바쳤다. 선생은 1977년 10월 자신과 “대한여자애국단의 사업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재정 출납”이라고 하며, 그 내역을 열거했다.

“상해 임시정부에 1,000달러, 공복위로금으로 500달러, 상해 독립신문사(獨立新聞社)에 300달러,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 군축선전비로 500달러, 신한민보(新韓民報社) 식자기 값으로 500달러, 간도(間島)동포 기근구제금으로 67달러, 송미령(宋美齡) 여사 군사위로금으로 370달러, 멕시코 동포 하바나로 이주해 갈 때 동정금으로 40달러, 쿠바 마탄사스 구제금으로 55달러, 수재민 구제금 368달러, 본국 수재민 172달러, 본국 소년갱생운동에 55달러, 황온순고아원에 58달러, 2차 대전 미군적십자사에 570달러, 로스앤젤레스(羅城-로스앤젤레스) 출정(出征) 군인무도회에 194달러 등으로 총 출남액수가 46,298달러”라고 밝혀 놓았다.

해방 이후에도 재미한인전후구제회(在美韓人戰後救濟會)와 함께 본국에 구제품을 보내기도 했다.

선생은 1982년 5월 31일 오전 10시 96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4. 온 가족이 함께 한 독립운동

함께 미국으로 건너온 선생의 가족 5명은 모두 건국훈장을 받았다. 선생이 1995년 애국장을 받은 것을 비롯하여 어머니 황마리아는 2017년 애족장, 남편 김성권은 2002년 애족장, 큰 동생 강영승은 2016년 애국장, 올케 강원신은 1995년 애족장을 받았다.

강혜원 선생 가족사진
강혜원 선생 가족사진

황마리아(1863~1937)는 하와이 한인사회 여성운동의 선구자였다. 일찍이 하와이에서 강혜원과 함께 호놀룰루에서 부인회를 조직하여 한인 부인들의 자립을 도모한 것을 시작으로 1913년 4월에는 호놀룰루에서 대한인부인회를 조직하고 하와이 부인운동의 깃발을 올렸다. 대한인부인회 회장으로서 한인 아동들의 국어 교육, 일본상품 배척, 동포 구제 등을 목적으로 활동했다. 같은 해 9월에는 큰 딸이 회장이 되어 대한인부인회를 이끌자, 황마리아는 딸과 함께 재봉소를 설치하고 남녀 양장을 제작 판매하기 위해 필요한 자금을 모으는 수전위원(收錢委員)으로 활동했다. 이후 1913년 10월 큰 딸이 결혼을 위해 북미로 떠나자, 하와이에 홀로 남아 부인회 활동을 계속했다. 1914년 대한인부인회 재무로서 회원들과 함께 서간도 재난동포를 위해 구제금 300달러를 모아 송금했다. 이후 6년 동안 부인회에서 활동하면서 국내를 비롯한 국외 재난동포들을 위해 구제사업을 전개했다.

1919년 3월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황마리아는 즉각 대한인부인회 명의로 회의를 소집했다. 3월 15일 호눌룰루에 위치한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관에서 모인 각 지방 여성대표 대표자는 선생을 포함하여 41명이었다. 황마리아는 이들과 함께 공동대회를 열고 향후 전개될 독립운동 후원금을 모집하는 한편, 적십자대 업무와 재난동포 구제를 결의했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자신과 딸이 함께 조직해 7년간 활동하던 대한인부인회를 같은 달 29일 조직된 대한부인구제회로 통합시켰다.

1928년 5월에는 호놀룰루감리교회 내에 조직된 부인보조회에서 부회장으로 선임되어 활동했다. 1930년 1월에는 29인과 함께 하와이 한인협회를 조직하여 활동했다. 하와이 한인협회는 한인의 정치기관 설립, 대한민국임시정부 후원을 목적으로 조직한 단체였다. 이후 대한부인구제회에서 지속적인 활동을 전개했으며, 1936년 11월에는 대한부인구제회 회장으로 임시정부의 독립군 양성을 후원할 목적으로 김구(金九)에게 100달러를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1937년 8월 72세를 끝으로 생을 마감했다.

강혜원의 남편 김성권(1875~1960)은 경북 경주 출신의 한학자이자 문필가였다. 일찍이 일본에 유학하여 신학문을 배운 지식인이기도 했다. 26세가 될 때까지 공부와 장사, 그리고 농사를 지었다. 이후 새 학문을 배우겠다는 일념으로 1904년 1월 23일 당시 29세의 늦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하와이 사탕농장 노동자로 이민했다. 이민후 곧바로 하와이 오아후 섬에 있는 에와농장에 배치되어 노동했으나, 막노동을 한 적이 없어 고생했다. 이때 함께 이민온 친구 강영소의 도움으로 농장 노동자를 상대로 음료수를 팔 수 있는 자그마한 상점을 운영했다. 장사는 잘되었으나 외상값이 회수되자 않는 바람에 1906년 식료품점은 문은 닫았다.

1905년 1월 하와이 한인들이 대한제국정부에 영사관 설치를 요구하자, 일제는 대한제국정부를 협박하여 호놀룰루 일본총영사를 대한제국 명예총영사로 임명하였다. 이는 일제가 미주 한인들을 지배하려는 목적이었다. 이에 분노한 하와이 한인사회는 일제에 대항하기 위해 항일단체를 조직했다. 김성권은 강영소 등과 함께 1905년 5월 항일운동과 일본상품 배척 등을 내세우며 에와농장 한인노동자를 중심으로 에와친목회를 조직했다. 1년 뒤인 1906년 5월 친목회에서 기관지 『친목회보』를 간행하자, 문필가 재능이 뛰어난 그가 주필로 1년간 활동하며 한인들의 단결, 애국심 고취를 위해 노력했다. 1907년 9월 하와이 24개 한인단체가 통합하여 한인합성협회를 조직할 때, 에와친목회 회원들과 함께 이를 주도했다. 한인합성협회 조직되자, 총무를 맡는 한편, 기관지인 『한인합성신보(韓人合成新報)』주필로 활동하며 하와이 한인사회 통합과 민족의식 고취에 힘썼다. 이러하나 활동 중 병이 나자, 1908년 2월 치료를 위해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갔다.

북미로 건너온 뒤에도 하와이 한인합성협회 대표 자격으로 활동했다. 1908년 7월 덴버에서 박용만(朴容萬) 등이 개최한 애국동지대표회 참석을 비롯하여 공립협회와의 통합에도 한인합성협회 대표로서 참여하여 마침내 1909년 미주한인의 통일기관인 국민회 창립이라는 성과를 이뤄냈다. 1913년 12월 결혼한 뒤에는 캘리포나아주를 중심으로 포도농장과 점포 서기 등으로 일했다. 1918년부터 1919년까지 대한인민회 수전위원(收錢委員)으로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한 적도 있으나, 주 활동은 흥사단이었다. 1919년 4월 제91단우로 흥사단에 입단한 이래 1930년대 중반까지 흥사단 이사장 등을 지내며 평생 흥사단을 위해 청춘을 바쳤다. 이 영향으로 부인 강혜원 역시 흥사단 단원으로 가입하며 남편을 도왔다.

1941년에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조직된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에 가입하여 조선의용대와 김원봉(金元鳳)의 민족운동을 후원했다. 1943년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가 조선민족혁명당 미주지부로 개편되자, 집행위원장으로 선임되었고, 그해 9월에는 기관지 『독립』을 발간하면서 독립신문사 사장이 되어 해방이 될 때까지 활동했다.

강영승은 미주한인사회 최초로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인물이다. 이로 인해 미주 한인사회에서는 이승만(李承晩)·정한경(鄭翰景)과 함께 ‘미주(美洲) 3박(博)’ 즉 미주 한인의 3대 박사로 불리웠다.

강영승의 본명은 강지승이다. 평양 박석골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한문과 일본어를 배웠다. 1904년 강원신과 결혼하여 어머니 등 5명의 가족과 함께 1905년 6월 하와이로 노동이민했다. 하와이 도착후 사탕농장에서 일을 했으나, 어머니의 열성으로 호놀룰루로 건너가 민찬호(閔贊鎬) 등이 운영하던 한인영어학원에 입학했다. 1909년 2월 하와이 한인합성협회와 북미 공립협회가 통합하여 국민회를 창립하자, 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 시찰로도 활동했다. 호놀룰루에서 소학교와 중학교 과정을 모두 마치고 1912년에는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하여 쿠퍼의과대학(Cooper Medical Collage)에 입학했다. 대학 입학이 가능했던 건 어머니와 아내의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어머니와 아내는 10년간 떨어져 지내며 노동으로 번 돈으로 학비를 마련하여 보냈다. 1914년에는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법무원으로 캘리포니아주 정부를 상대로 북미지방총회를 자치기관으로 인정받는 주요 역할을 해냈다. 그러나 주위에서 법이나 정치학을 배우기 권하며 의학공부를 말리자, 법률을 공부하기로 결심했다. 1년간 시카고의 해밀턴 법률학교(Hamilton Collage of Law)의 통신과를 통해 공부하다가 정식으로 학교에 입학하라는 통지를 받고 시카고로 이주했다. 시카고는 당시 한인 유학생들의 중심지였다. 그곳에서 학사와 석사를 모두 마치고 1922년 마침내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시카고에서 학업을 하면서도 1919년 대한인국민회 시카고지방회 부회장, 1920년 한인유학생회총회 결성발기자회로도 활동했다.

박사학위를 받은 후 “서울·평양에 있는 숭실학교에 나가서 가르칠 생각도 해보았어요. 그러나 일제 강점기라 어려웠고 6.25사변 등으로 다시 그 기회를 영영 놓쳤어요”라고 하며 한국에서 법치를 펼치지 못한 것을 아쉬움과 회한으로 남겼다.

박사학위 취득 후 변호사 개업을 신청했으나 허락받지 못했다. 동양인이라는 것과 시민권이 없다는 이유였다. 이후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와 1922년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총회장, 기관지 『신한민보(新韓民報)』발행인 겸 편집인, 1923년 대한인국민회 샌프란시스코지방회 법무 등으로 활동하며 민족운동에 헌신했다.

이후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하여 1930년 광주학생운동 후원을 위해 로스앤젤레스 한인공동회를 조직했으며, 1932년에는 5월 대한인국민회총회 상해사변(上海事變) 임시위원부 부장을 맡아 한국의 독립운동 선전에 매진했다.

이후 시카고로 이주하여 해방이 될 때까지 대한인국민회 시카고지방회에서 활동했다. 1940년 이후에는 조선의용대 후원회 시카고지회와 조선민족혁명당 미주지부 시카고 지역 책임자로도 활동했다. 매형 김성권은 로스앤젤레스에서, 그는 시카고에서 김원봉의 민족운동을 지지 후원했다.

강원신은 1904년 18세의 나이로 강영승과 결혼하여 하와이로 이주했다. 하와이에서의 생활은 남편의 학업과 생계를 위한 노동의 연속이었다. 이후 시누이 강혜원의 초청으로 미 본토로 이주하면서부터 미주한인사회 부인운동에 앞장섰다. 다뉴바의 포도농장에서 시간당 15센트의 임금을 받으면서도 남편과 독립운동을 위해 헌신한 것이다.

강혜원 선생의 무궁화로 수놓은 한반도
강혜원 선생의 무궁화로 수놓은 한반도

1919년 3월 2일 다뉴바에서 시누이 강혜원 등과 함께 신한부인회를 조직하고 회장이 되어 한인 부녀자들의 민족정신 고취와 대한인국민회의 민족운동을 적극 후원했다. 같은 해 5월부터는 시누이와 함께 미주 각지에 흩어져 있는 부인회 통합운동에 앞장섰다. 그 결과 같은 해 8월 다뉴바에서 미주내 부인운동단체를 통합하여 대한여자애국단을 조직했다. 대한여자애국단은 이후 해방이 될 때까지 미주 한인사회 부인운동을 이끌었다.

대한여자애국단 창설 후 선생은 초대 단장, 강원신은 초대 재무를 맡았다. 그후 3년째 되던 해, 대한여자애국단 총단장으로 선임되자, 임시정부를 후원하기 위해 매월 3달러씩 단비(團費)를 모아 송금하는 등 시누이(강혜원)와 함께 부인운동과 함께 민족운동 후원에 헌신했다.

위와 같이 선생을 비롯하여 어머니, 동생 등 가족이 모두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그 공로로 어머니 황마리아는 2017년 애족장, 남편 김성권은 2002년 애족장, 동생 강영승은 2016년 애국장, 올케 강원신은 1995년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선생은 1982년 5월 31일 별세했으며, 로스앤젤레스 로즈데일(Rosedale) 공동묘지에 묻혀 계시다가 2016년에 남편과 함께 유해봉환되어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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