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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유찬희

훈격아이콘 훈격: 독립장
훈격아이콘 서훈년도: 2010년

주요공적

1919~1921년 대한국민회 활동 참여, 산하 국민회군 조직

1923년 동성노농공사 간사

1926년 블라디보스톡에서 항일의식 고취 활동

공훈전자사료관 이달의 독립운동가 콘텐츠 심볼

유찬희 / 유기석 / 유기문

유찬희 柳纘熙 ,(1884.08.08)~1930.02.13. 서울 서울 , 독립장 2010 유기석 柳基石 ,1905.01.12~1980.11.27. 서울 서울 , 독립장 2008 유기문 柳基文 ,(1910)~미상. 서울 서울 , 애족장 2010
아버지와 두 아들, 광복을 위해 목숨을 건 불꽃같은 삶

아버지와 두 아들, 광복을 위해 목숨을 건 불꽃같은 삶

유찬희 선생은 1910년대 북간도에서 간민회에 소속되어 한인의 민족의식 고취와 권익 옹호를 위해 활동하였고, 1919년 3월 용정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고 대한국민회를 조직한 후 참모장으로 조직 확대와 군비 증강을 위하여 노력하였으며, 1920년 일본군의 간도 출병 후 연해주로 넘어가 고려혁명군의 증강을 통해 대일항전을 기도하였다. 유기석 선생과 유기문 선생은 아버지 유찬희 선생의 독립정신을 본받아 1930년대에 아나키즘단체인 남화한인청년연맹, 흑색공포단 등에 가입하여 요인 암살, 기관 파괴, 친일파 처단 등의 의열투쟁으로 항일의식을 고취하였고, 1940년대에 광복군을 초모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2020년 5월 가정의 달에 세 부자가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것은 그 의미가 특별히 깊다. 아버지와 아들의 민족을 위한 불꽃같은 삶, 그리고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목숨을 건 의열투쟁에 대하여 추적해보자.

1. 유찬희 선생의 독립운동

선생은 1884년 8월 8일 황해도 금천군 합탄면 후매리 대동에서 전주유씨 유헌보(柳憲甫)의 여섯 자매 중 차남으로 출생하였다. 자는 춘계(春溪)이다. 어려서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는데 시경(詩經), 서경(書經), 역경(易經), 예기(禮記), 춘추(春秋) 등 오경(五經)을 열독하였다고 한다.

선생은 이안라(李安羅)와 결혼하여 딸 둘과 아들 둘을 두었다. 장녀는 신덕(信德), 차녀는 신영(信永)이다. 그리고 장자는 기석(基石)이고 차남은 기문(基文)이다.

선생은 1900년 서울 정동의 감리교 학교인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근대적인 학문을 수학하였다. 그러면서 국제정세를 파악하며, 1905년의 을사늑약과 1907년 고종황제의 강제퇴위와 군대해산을 보면서 항일의식과 민족의식을 형성하였다. 국권을 수호하기 위해서는 인재를 길러야 한다는 생각 하에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09년 경 평안도, 황해도, 함경도 인사들이 중심을 이루는 서북학회의 금천지회에 가입하여 학사시찰위원 등으로 활동하면서 교육을 통한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일제가 보안법, 광무신문지법, 사립학교령 등으로 애국계몽운동을 탄압하자 소기의 성과를 거두기가 쉽지 않았다.

북간도에서의 독립운동기지 건설

더욱이 일제가 1910년 8월 29일 국권 침탈 후 신문의 폐간과 정치·사회단체의 해산을 단행하자 학회를 통한 계몽운동을 할 수 없었다. 신민회 회원 등의 독립운동가들이 서간도와 북간도, 연해주 등지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려고 노력하던 시기에 선생은 국내에서 기독교회를 배경으로 활동하였다. 1911년부터 1913년까지 강원도 이천에서 잠복하며 포교하면서 교회의 울타리 하에서 청년을 비롯한 한인 지도자에게 근대적 지식과 국제적 식견을 갖게 하고, 이들의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그러나 이것마저 쉽지 않았던 선생은 아들 유기석이 8살이던 1913년 경 같은 감리교 신자인 권사용(權思容)과 함께 강원도 이천군(伊川郡)을 떠나 원산에서 배를 타고 청진에 도착한 후 회령으로 가서 배를 타고 두만강을 건너 연길현(延吉縣) 국자가(局子街)에 도착하였다. 이것은 권사용이 1911년 이전 연길현 국자가에 설립한 태광학교(太光學校)의 교사로 선생을 초빙한 때문인 듯하다.

그런데 교사로서의 활동은 오래 지속되지 못하였던 것 같다. 북간도지방의 경제난으로 퇴학자가 속출하고, 또 기부금 모집도 어려워 경비 문제로 오래 운영되지 못하고 태광학교가 1915년 1월 29일 폐교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김약연 선생
김약연 선생

한편 선생은 북간도에서 한인단체에 참여하여 동지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3년 북간도의 연길현에서 김약연, 이동춘, 정재면, 김립 등의 주도로 간민회가 조직되자, 이 단체에 참여하였으며 한인의 식산흥업과 국적취득 등 권익을 옹호하고, 교육과 언론을 통해 한인을 계몽하였다. 그런데 간민회는 1914년 3월 위안스카이(遠世凱)의 중국 내 외국인의 자치조직을 철폐하라는 ‘연성자치기관 철폐 명령’으로 그만 해체되고 말았다.

간민회가 해산되고 한 해가 지난 1915년 3월, 선생은 중일전쟁의 발생에 대한 소문을 듣고 동지들과 협의하여 사실여부를 파악해보고, 대처방안을 모색하였다. 3월 27일 밤 권사용 등 14~15명과 국자가(局子街) 연길여관에서 회의를 갖고 박동원(朴東轅)과 김옥성(金玉成)을 대표자로 삼아 연길도윤을 직접 만나 시국 상황을 알아보게 하였다. 그리하여 연길도윤으로부터 “중일전쟁을 하지 않고, 국권과 무관한 일본의 요구는 들어주려고 하나, 만일 일본이 출병하여 중국을 공격한다면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기보다 차라리 결전을 할 것이다.”라는 답변을 들었다. 그리고 1915년 8월 29일 국치일에 권사용 등 30여명과 함께 국자가의 기독교회에 모여 기념식을 거행하였다. 이 자리에서 선생은 한시(漢詩)로써 고국을 잊을 수 없다는 취지의 연설을 하였다.

선생은 1916년 무렵부터 무악흥업회사라는 무역회사를 운영하여 경제적으로 상당한 부를 축적하였다. 또한 1910년대 중후반 장로교 목사인 베이커와 그의 부인 레베카에 의하여 재건된 태광학교의 교장으로서 활동하면서 한인 자제에게 근대적인 지식을 갖게 하고 이들의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3·1운동과 대한국민회의 조직

선생의 독립운동은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 직후인 1919년 초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미주와 노령에서 대표를 파리에 파견하여 한국의 독립 문제를 제기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1919년 2월 초 명동중학교의 교장 김약연, 교사 조극, 용정의 김신근, 정재면, 국자가의 김영학, 박경철, 최원일 등 십여 명과 회의를 가졌다. 그리하여 종교계 대표자 정재면, 교육계 대표자 김약연, 사회계 대표자 이중집을 2월 12일 파리에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그 비용은 선생과 김신근(金信根)이 마련하였다. 2월 17일에는 박동원의 집에서 열린 한국·중국·러시아·일본 기독교 전도 대표자 대회에 참석하여 독립운동 자금으로 1인당 50원을 갹출하기로 결정하였고 선생은 500원을 내놓았다.

대한국민회 본부 터(왕청현 의란구)
대한국민회 본부 터(왕청현 의란구)

선생은 국내에서 3·1운동이 발생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3월 8, 9, 10, 11일에 김영학, 마진, 구춘선 등과 북간도의 국자가 등지에서 회의를 가졌다. 3월 12일에는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다음날인 3월 13일 정오 용정에서 국자가 화룡, 용정 등지에서 모인 1,300명의 군중을 이끌고 태극기와 ‘한국독립(韓國獨立)’과 ‘정의인도(正義人道)’라고 쓴 큰 깃발을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치며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더 나아가 3월 중순 북간도의 국자가 등지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고, 구춘선, 마진, 김영학, 박동원, 유하천, 이봉우 등과 대한독립기성총회와 충열대(忠㤠隊)를 조직하였다. 특히 재무부장으로서 대한독립기성총회와 충열대의 활동을 위한 자금을 모집하였다. 그리고 대한독립기성총회가 연길현 춘양향(春陽鄕) 하마탕에 본부를 두고 회장 구춘선, 부회장 강구우 등이 이끄는 대한국민회로 발전하자, 이에 참여하여 연길현과 왕청현(汪淸縣)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1919년 3~4월 연해주와 상해, 국내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될 무렵, 선생은 김영학, 박동원 등과 연해주로 가서 대한국민의회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1919년 9월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 국내의 한성정부가 합하여 통합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이에 참여하였다. 한편 우스리스크에 거주하던 선생은 합자회사인 대동상무회사를 설립하고 사장으로 활동하면서 1920년 1월 18일 블라디보스톡에서 김치보 등과 블라디보스톡상무총회를 설립하고 부의장으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1920년 4월 6일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주외재무관서의 아령 부재무관에 선임되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위한 자금을 모집하였다.

또한 선생은 대한국민회의 무장투쟁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1920년 6월에는 대한국민회의 총기구입의원으로 연해주에서 총기를 구입하였고, 동년 8월에는 연길현에서 대한국민회 참모장으로 활동하였으며, 동년 12월에는 대한국민회 재무부장에 선임되어 자금을 지원하였다. 1920년 6월의 봉오동전투와 1920년 10월의 청산리전투의 승전은 선생의 재정적, 군수적 지원에 힘입은 바가 크다.

고려혁명군의 조직과 한·러 제휴에 의한 대일항전의 모색

1920년 10월 소위 일본의 간도 출병으로 독립군이 북간도에서 활동하기가 여의치 않자 선생은 항일전투의 역량을 보존하기 위해서 독립군과 함께 북만주로 이동하였다. 1921년 1월~6월 경 구춘선, 마진 등 대한국민회의 회원 및 안정근 등과 액목현(額穆縣)에 거주하면서 러시아령으로의 이동을 모색하였다.

1921년 12월 경에는 돈화현에서 김하구(金河球)의 권유로 구춘선, 마진 등 대한국민회의 요인들과 상해파 고려공산당의 돈화현 중앙총회를 조직하고 그 참사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고려혁명군을 조직하여 소비에트 러시아와 연계하여 대일항전을 전개하려고 하였다. 그러면서 1923년 12월에는 돈화현에서 수전(水田)을 개발하고 조선독립을 위한 항일사상을 고취하는 동성노농공사(東省老農公司)의 간사(幹事)로 활동하였다.

1923년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변혁하기 위해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의가 개조파·창조파의 분열되었을 때 선생은 창조파의 입장을 취하였으며, 1923년 중반 국민대표회의의 분열 후 북경에서 창조파가 국민위원회와 국무위원회를 조직하였을 때 국민위원회의 국민위원에 선임되었다.

1924년 2월 블라디보스톡에서 제1회 국민위원회가 개최되자 그는 여기에 참석하여 소비에트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새로운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무장투쟁을 전개하는 것에 대해 협의하였다. 그렇지만 소비에트 러시아의 일소평화조약의 체결과 지원 거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후 선생은 연해주 우스리스크에서 남감리교회의 목사로 선교활동을 벌이면서 한인의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26년 블라디보스톡 신한촌에서 3·1운동 8주년 기념 강연회를 개최하고 일본제국주의를 비판한 것이 그 사례이다.

위암에 걸린 선생은 1930년 귀국하여 서울의 세브란스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별세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201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2. 유기석 선생의 독립운동

유기석 선생은 유찬희 선생의 장남으로 독립운동을 할 때에는 유서(柳絮), 혹은 유수인(柳樹人)이란 이명을 사용하였다.

선생은 1905년에서 1911년까지 황해도 금천에서 생활하다가 강원도 이천으로 가서 1913년까지 거주하였다. 이후 1913년 아버지와 함께 연길현 국자가에 가서, 1916~17년 태광학교(太光學校)에서 수학하였다. 이후 화룡현(和龍縣)으로 이주하여 1917~18년 창동학교(昌東學校)에서 소학교 과정을 마친 후 1918~20년 연길도립 제2중학교에서 2년간 수학하였다. 제2중학교에 다니면서 중국어를 배웠고 후일의 아나키스트 동지 심용해(沈容海, 沈茹秋)를 만났다.

1919년 북간도에서 소위 3·13만세시위가 전개되었을 때 선생은 아버지를 도와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특히 심용해와 함께 충열대(忠㤠隊)에 속하여 태극기와 전단의 제작 및 배포, 독립만세시위의 전개 등의 활동을 하였다. 3·1운동 후 대한국민회에 참여하여 자금지원과 무기 조달 등의 활동을 하였던 아버지 유찬희 선생을 따라 왕청현(汪淸縣) 알아하(嘎雅河)로 이주하였다.

흥사단 활동과 아나키즘 수용

1920년 9월 말 상해로 이동하였다. 선생은 상해에서 이동휘, 여운형, 이광수, 안창호 등의 가르침을 받았다. 특히 흥사단의 무실역행 주의에 감명을 받아 1920년 흥사단에 가입하였고, 원동위원부에 속하여 활동하였다.

1921년 9월 미국의 기독교회에서 설립한 남경(南京)의 화중공학(華中公學)에 2학년으로 편입하였으며, 흥사단 원동위원부의 활동에 열성적으로 참여하였다. 1922년 6월 흥사단 남경단우회의 회의를 주재하였고, 1924년 남경의 협진회관에서 개최된 흥사단 제10회 원동대회에서 「우리는 활동하자」라는 주제로 10분간 강연을 하기도 하였다.

선생은 1924년 6월 화중공학을 졸업하고 북경으로 가서 그 해 9월 조양대학(朝陽大學) 경제과에 입학하였다. 북경의 조양문(朝陽門) 대가(大街)에 위치한 한인기독교회에 거주하면서 기독교청년회와 북경고려유학생회 활동을 주도하였다. 그리고 이 무렵에 북경에 조직된 흥사단 북경단소에서 북경반(北京班)을 이끌면서 안정근, 김승만, 이탁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한편 그는 북경에서 유학하면서 심용해와 함께 아나키즘을 수용하였다. 아나키즘은 생존경쟁의 사회진화론을 비판하고 서로 돕는 상호부조론을 신봉하였으며, 무력과 권력과 권위와 위계 등에 의해 개인과 민족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을 비판하였다. 1920년대 중반 북경의 한인들 중에는 신채호와 유자명처럼 아나키즘에 경도된 사람이 적지 않았다. 이들처럼 유기석은 한국인의 자유를 박탈한 일제에 저항하여 독립을 되찾고, 자본계급이 지배하는 자본주의와 무산계급이 독재하는 공산주의를 비판하고, 무권력과 무정부의 공산사회를 수립하고자 하였다.

선생은 1925년 6월 30일 북경 천안문에서 개최된 ‘5·30학살사건 규탄 국민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내었다. 중국 국적을 가졌으나 외국 출신 중에는 제일 먼저 등단하여 중국어로 “중화민족 만세”와 “타도 일본제국주의”를 외치며 항일의식을 고취하였다.

경제적인 이유로 1925년 말 조양대학을 중퇴하고 산서성(山西省) 태원(太原)에 있는 군벌 염석산(閻錫山) 비행대에 들어가 안창남의 통역으로 활동하였다. 이곳에서 비행술을 배웠으며, 북경에 가서 심용해를 총격한 밀정을 처단하는 활동을 하였다.

1926년 북경에 온 선생은 안창호의 독립운동을 후원하였다. 1926년 10월 북경에서 안창호가 흥사단원과 기독교인, 천도교인, 대구·경북인, 창조파 등의 독립운동가들과 대독립당조직북경촉성회를 조직하는 데 기여하였다. 이는 국내에서 일부 지도자들이 자치운동과 같은 타협노선을 모색하고 있을 때 이에 반대하며 독립운동노선을 굳게 지켰던 것이다. 그리고 1927년 1월 안창호를 보필하고 길림에 가서 만주지역의 한인들이 독립운동노선을 견지하도록 도왔고, 안창호가 중국 관헌에 체포되자 그의 석방을 위해 노력하였다.

남화한인청년연맹의 결성과 의열투쟁의 전개

만주에서 관내(關內)로 돌아온 선생은 1927년부터 중국의 하문(廈門)과 천주(泉州) 등지에서 중국의 아나키스트 진망산(秦望山)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1928년 3월 상해에서 한일원(韓一元), 윤호연(尹浩然) 등과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나고 무정부 공산사회의 건설을 지향하는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조직하였다. 그리고 『탈환』을 발간하여 독립정신과 상호부조사상을 전파하였다. 또 같은 해 6월 상해에서 이정규와 일본인 진희동(秦希同, 赤川啓來), 중국인 모일파(毛一波) 등과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을 조직하였다.

1928년 가을 이후 남창(南昌)에서 체류하며 신문사에서 근무하였다. 1929년에는 북경에 돌아와 북경시 판공실에서 북경시장 장음오(張蔭梧)의 비서로 활동하였다.

선생은 1930년 4월 상해에서 유자명(柳子明) 등과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을 결성하고 한인의 의열투쟁을 촉구하였다. 한편 동년 6월 천진에서 대한대독립당주비회가 창간한 『한국의 혈』의 고문으로 활동하며 안창호의 대독립당 결성 운동을 후원하였다.

백정기 선생
백정기 선생

1931년 천주(泉州)의 여명중학교(黎明中學校)에서 교사로서 생활하다가 상해로 돌아와 동년 1931년 11월 경 유자명이 주도한 불멸구락부에 참여하여 아나키즘을 연구하였다. 그리고 북경에서 동북민중항일구국군의 별동대장으로 활동하던 선생은 1932년 상해사변(上海事變) 이후 정래동, 오남기, 유기문 등과 천진(天津)에 가서 일본총영사관 및 일본군사령부 파괴 등의 활동을 하였다. 그리고 1933년 3월 원심창, 백정기, 이강훈 등의 주중국일본공사 유길명(有吉明) 처단 미수사건을 지원하였다.

이로 인해 체포의 발길이 다가오자, 선생은 내몽고의 포두(包頭)로 가서 1933년 7월 반일만(反日滿) 의열투쟁을 목적으로 한 중한호조회조직회(中韓互助會組織會)에 참여하였다. 1935년 남화한인청년연맹원 엄순봉 등과 상해조선인민회 간부와 옥관빈 등의 처단에 관계하고 검거를 피해 숨어 지냈다. 이후 개봉(開封)에 거주하며 『하남일보(河南日報)』의 주필로 활동하며 중학과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선생은 김구와 안공근의 합작 제의를 받고 상해를 떠나 개봉(開封)으로 이동하였다. 1938년 김구(金九) 및 남화한인연맹원과 협력하여 일본 군함 출운환(出雲丸)호 폭침(爆枕)과 상해지역 일본 책임자 곡정지(谷正之) 공사의 암살을 시도하였다.

1938년 소북(蘇北)으로 가서 중국 유격대에서 활동하다가 교육사업에 종사하던 선생은 1943년 강서성 상요(上饒)에서 조선민족혁명당계열의 한국광복군 제1지대와 한국독립당 계열의 제3징모분처의 대립을 중재하였고, 제3전구한교전지공작대(戰區韓僑戰地工作隊)를 조직하고 지도하였다. 그리고 1943년 조선민족혁명당에 입당하여 중앙집행위원에 선임되었고, 1944~1945년 남경(南京)에서 광복군(光復軍) 제3징모분처의 대장으로 초모활동(招募活動)을 전개하였다.

광복 후 1946년 상해에서 중한문화협회 동남분회 주비위원 등으로 활동하면서 『중한문화』의 편집을 통해 한중의 우의를 위해 활동하였다. 1946년부터 2년간 남통학원(南通學院)의 경제학 부교수로 활동하였고, 1948년 7월부터 1년 간 산동성 청도(靑島) 화북연초공사의 고문으로 근무하였다. 1952년 상해에서 상업에 종사하다가 동년 11월 강소사범학원(江蘇師範學院)의 역사계 교수로 취임하여 이후 소주대학(蘇州大學) 사회학원으로 변경되고서도 교수로 활동하다가 1980년 별세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200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3. 유기문 선생의 독립운동

흑색공포단에서의 의열투쟁

유자명 선생
유자명 선생

유찬희 선생의 둘째아들이자 유기석 선생의 동생인 유기문(1910~미상) 선생은 가족과 함께 강원도 이천, 연길현 국자가, 왕청현 알아하 등지에서 거주하다가 1920년 경 아버지와 함께 연해주 우스리스크에 가서 소학교에 입학하여 2년간 수학하였다. 1922년에는 연길 용정의 영신중학교에 입학하여 2년 동안 수학한 후 개성의 송도고등보통학교(松都高等普通學校)에 전학하여 1930년 졸업하였다.

1931년 2월 유학을 핑계로 인천에서 배를 타고 상해에 도착한 선생은 상해의 일본총영사관 구치소에 구류되어 수일간 고초를 겪은 후 천주(泉州)에 가서 형 유기석을 만났다. 형으로부터 아나키즘을 수용한 선생은 1년 전인 1930년 4월 중국 상해(上海)에서 유기석, 유자명(柳子明), 장도선(張道善), 정해리(鄭海理) 등이 무정부주의 신사회(新社會) 건설을 목적으로 조직한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에 가입하였다.

형 유기석과 함께 상해에 온 선생은 1931년 11월 상해 프랑스 조계 포석로(鋪石路)의 백정기(白貞基) 숙소에서 아나키즘단체 남화한인청년연맹의 의열투쟁조직인 흑색공포단(黑色恐怖團)을 결성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천진(天津)투탄의거’와 ‘육삼정(六三亭)의거’, 변절자에 대한 숙청 등의 의열투쟁을 전개하였다.

특히 1932년 12월 ‘천진투탄의거’에 직접 참여하였다. 1932년 10월 유기석이 유자명 등과 북경에 가서 폭탄을 가져온 데 힘입어 전이방(田理芳)과 거사를 감행하였다. 12월 16일 전이방이 천진 주재 일본총영사관 관저에 폭탄을 던져 건조물의 일부를 파괴하였을 때, 선생은 프랑스 조계의 부두에 정박 중인 일본 기선에 폭탄을 투척하였다. 비록 큰 손해를 입힌 것은 아니지만 이 투쟁으로 한인에게 항일의식을 고취하였고, 중국인에게는 한인들의 반일노선을 각인시킬 수 있었다. 이런 점에서 선생의 의열투쟁은 중국 국민당으로부터 군사적인 지원을 받는 데 상당한 기여를 하였던 것이다.

이 이후에도 남화한인연맹과 흑색공포단 활동을 하던 선생은 1935년 5월 흑색공포단의 엄순봉과 이규호가 상해거류민회장 이용로(李容魯)와 친일파 옥관빈을 처단한 사건에 참가하였다. 이후 유기문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201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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