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942. 박기수 (朴基秀) 등 6인과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2. 1943. 4 경북 영천신사를 방화.
3. 1943. 4 대구신사를 방화하였으나 실패.
4. 1943. 5 대구 주둔일군 80연대 맨홀 내에 세균 (細菌) 을 투입.
5. 1943. 민심교란을 위하여 야간에 대구시내 관공서에 태극기를 게양하고 시내 요소에일군 패전 전황삐라를 살포.
6. 1943.일군 24부대 병기고를 폭파케 함.
7. 1944. 군자금 모집 중 발각되어 징역 4년 형을 받음. (복형증명서 (服刑證明書) 당시변호인 3인의 입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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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943. 4 경북 영천신사를 방화.
3. 1943. 4 대구신사를 방화하였으나 실패.
4. 1943. 5 대구 주둔
5. 1943. 민심교란을 위하여 야간에 대구시내 관공서에 태극기를 게양하고 시내 요소에
6. 1943.
7. 1944. 군자금 모집 중 발각되어 징역 4년 형을 받음. (
- 일군(日軍) : 일제 군대.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7권(1990년 발간)
경북 영천(永川) 사람이다.
1942년 박기수(朴基秀) 등 6인과 함께 항일비밀결사를 조직하고 1943년 4월에는 영천신사(永川神社)를 불태우고 대구(大邱)신사에 방화하였으나 실패하였으며, 동년 5월에는 대구 주둔 일본군 80연대 내에 세균을 투입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또 동년 밤중에 대구 시내 관공서에 태극기를 게양하고 시내 곳곳에 일군 패전전황을 알리는 유인물을 살포하여 항일민족의식을 고취하였으며 일본군 24부대 병기고를 폭파하였다고 한다.
1944년에는 군자금 모집 중에 발각되어 징역 4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복역증명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