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훈전자사료관

통합검색
독립유공자 명단보기
 

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4082 후손 확인이 필요한 독립유공자 입니다. 도움말
성명
한자 崔鳳天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등록된 사진이 없습니다.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1990 훈격 애족장
1919.3.15 갑산(甲山)지방 독립만세시위를 주동하여 적극 활동하다 체포되어 1919.6.20 경성복심법원(京城覆審法院)에서 징역 1년 6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원문보기 한자보이기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3권(1987년 발간)

함경남도 단천(端川) 사람으로 천도교(天道敎)인이다.

1919년 3월 15일 김명수(金明洙)·정국태(鄭國泰)·조석하(趙錫河) 등과 함께 갑산군(甲山郡)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3월 3일 서울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전해 받고, 천도교 지도자들과 몇차례에 걸쳐 숙의한 끝에, 서봉화(徐鳳化)는 단천지역을, 그는 갑산지역을 담당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이에 그는 3월 7일 고향을 떠나 8일 갑산에 도착하여 우선 이인면 가재리(里仁面加財里)에 있는 천도교 분교실로 가서 김길렬(金吉烈)을 만나 각지의 만세시위 소식을 전하고, 15일날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자고 제의하여 찬성을 얻었다.

9일에는 장평면 서부리(長平面西部里) 교구실과 화장리의 정완조(鄭完朝)를 방문하여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할 것을 권유하였다.

그러나 주동인물인 그가 외지인이라는 이유로 갑산군민이 이에 선뜻 응하지 않고 있을 때, 풍산군 안산면 하지경리(豊山郡安山面下地境里)의 천도교 교구실로부터 각지의 독립만세시위 상황을 연락받은 갑산천도교 전도사인 김명수가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거사계획은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이에 김명수는 3월 12일 후지리(厚地里)의 정국태를 만나서 거사일을 15일로 결정하고, 교구당 단위의 만세시위를 지양하고 군단위로 일원화된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하였다.

3월 15일 에정대로 갑산교구당에 2백여명의 시위군중이 모이자, 그는 이들과 함께 태극기를 선두에 내세우고 시위행진을 시작하였다.

이때 일본 헌병이 출동하여 제지하였으나, 이를 뿌리치고 군청을 습격하는 등 격렬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러나 급보를 받은 혜산진(惠山鎭)수비대에서 12명의 병력을 파견하여 군중은 강제 해산되었다.

그는 이날 밤의 검속 때 체포되어, 이해 6월 2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1년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2권 722·726·728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14권 980면
  • 매일신보(1919. 5. 6)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5권 1044∼1046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최봉천 - 함남 단천(丹川) 1919년 갑산군 장평면 만세운동
본문
1863년 10월 10일 함경남도 단천군(丹川郡) 신제리(新濟里)에서 태어났다. 고향에서 농업에 종사하였다. 천도교인이며, 1919년 3월 15일 갑산군(甲山郡) 장평면(長平面)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갑산군의 만세시위는 함경남도 내 천도교인들이 독립만세운동을 추진하는 과정과 밀접하게 관련을 맺으면서 전개되었다. 3월 3일 함경남도 단천군의 천도교 지도부에 독립선언서와 만세시위 소식이 전해졌다. 3월 5일 단천 천도교구실 전교사 서봉화(徐鳳和)에게서 교주 손병희가 조선독립을 달성하기 위해서 서울(京城)에서 시위를 전개한다는 사실을 들었으며, 단천군의 천도교 지도부의 일원으로 만세시위를 단천군과 갑산군으로 확산시키기로 결의하였다. 이에 서봉화는 단천군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기로 결의하였다. 단천군 천도교 인사들의 결정에 의해서 갑산군으로 가서 만세시위를 권유하고 설득할 임무를 부여받았다. 3월 8일 갑산군(甲山郡) 이인면(里仁面) 가재리(加財里)의 천도교 분교실에 갔다. 그곳에서 김길렬(金吉烈)을 만나서 3월 15일 갑산 일대에서 만세시위를 일으킬 것을 권유하였다. 3월 9일에는 평면(長平面) 서부리(西部里) 천도교당, 그리고 그날 밤에는 화장리(化墻里)의 정완조(鄭完朝)를 방문하였다. 정완조를 비롯해서 그 지역 천도교 인사들에게 3월 15일 만세시위를 일으키자고 권유하였다. 갑산군의 천도교 인사들은 단천군 천도교 인사들이 제안한 3월 15일 만세시위 계획을 쉽게 결정하지 못하였다. 그런 상황에서 3월 11일 갑산군 천도교구의 전도사 김명수(金明洙)는 풍산군(豐山君) 안산면(安山面) 하지경리(下地境里)의 천도교구에서 보낸 서신을 받았다. 그 서신에는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흐름에 동참해서 갑산군 천도교인들도 만세시위를 주도하도록 권유하는 내용과 전 민족이 궐기해야 한다는 격문이 포함되어 있었다. 서신과 격문을 받은 김명수는 갑산군 일대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기로 결심하였다. 3월 12일 김명수는 회린면(會麟面) 후지리(厚地里)에 사는 정국태(鄭國泰)의 집을 방문하였다. 그 자리에서 정국태·정수웅(鄭秀雄)과 함께 3월 15일 갑산군에서 대규모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심하였다. 3월 15일 오후 2시 혹한의 날씨에도 불구하고 갑산군 일대에서 천도교 인사들이 천도교당에 집결하였다. 이때 조병학(趙秉學)·박문옥(朴文玉)·조종현(趙宗鉉)·주남호(朱南浩)·정수익(鄭秀益)·정창원(鄭昌元)·김용균(金龍均)·조석준(趙錫俊)·조영호(趙英浩) 등과 함께 참여하였다. 조병학은 정수웅의 지시를 받아서 태극기를 게양하였다. 200여 명으로 구성된 시위대와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장평면 일대를 행진하였다. 일제 군경은 시위 진압을 시도하였지만, 시위대의 일원으로 이를 물리치고 갑산군청으로 돌진하였다. 결국 일제 군경은 혜산진(惠山鎭)에서 급파된 수비대와 함께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시위 당일 밤에 일제 군경의 검속에서 붙잡혀 재판에 넘겨졌다. 1919년 5월 2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이에 항소하였으나 6월 2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이에 상고하였으나 8월 9일 고등법원에서 상고를 기각되어 원심이 확정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도움말
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보안법위반 공소 기각 경성복심법원 1919-06-20 국가기록원
2 판결문 보안법위반 상고 기각 고등법원형사부 1919-08-09 국가기록원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안내
미확인
  • 해당 유공자는 묘소 위치 확인이 필요한 독립유공자 입니다. 더보기

관련 현충시설 정보

도움말
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감사의 글 Total 0
목록 개수

인쇄 목록
  •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십시오.
  • 이용자의 참여가 사이트 가치 향상에 큰 도움이 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 독립유공자 공적조서는 정부포상 결정당시의 ‘공적조서’를 공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으며,
  • 독립유공자 공훈록은 공적조서상 근거정보를 기본바탕으로 전문가의 원고집필을 통해 발간된 책을 온라인으로 제공하는 것입니다.
  • 따라서, ‘공적개요(공적조서)과 공적내용(공훈록)’은 원칙적으로 수정불가하며,
  • 다만, 온라인으로 제공되는 기본정보(성명, 생몰일자, 본적지)에 대한 사항은 ‘오류신고’를 통해 신청 가능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페이지 별 오류신고
화면(사료)위치 독립유공자 공적정보 > 최봉천(관리번호:4082) 오류 유형 *
오류 제목 *
오류 내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