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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번호 3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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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吳東振
이명 없음 성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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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적정보

공적정보
운동계열 만주방면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4권(1987년 발간)
포상년도 1962 훈격 대한민국장
공훈록

평북 의주(義州) 사람이다. 평양 대성학교를 졸업 후 고향에 일신(日新) 학교를 설립하였으나 일제의 강압으로 폐교되었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적극 참여하여 활동하다가 만주 관전현(寬甸縣)으로 망명하였다. 그곳에서 윤하진(尹河振)·장덕진(張德振)·박태열(朴泰烈) 등과 함께 광제(廣濟)청년단을 조직하여 활동하는 한편 안병찬(安秉瓚)·김찬성(金燦星)·김승만(金承萬)·김시점(金時漸)·오학수(吳學洙) 등과 함께 안동현(安東縣)에 대한청년단연합회를 조직하였으며, 1920년 4월 20일에는 제2회 정기총회 비밀회의에 광제청년단 대표로 참석하여 의용대원의 경비부담 방안 등을 논의하였다.

또한 1919년 10월 26일에는 김응식(金應植)과 함께 강변 8군 임시교통사무국 참사(江邊八郡臨時交通事務局參事)로서 지국시찰, 적십자회비 모집 등의 사명을 띠고 국내에 특파되기도 하였다. 1919년 11월 2일에는 안동임시의사회(安東臨時議事會)를 조직하여 활동하였으며, 1920년 2월에는 대한의용군사회·한족회·대한독립단 등이 통합되어 광복군사령부가 설치되자 제2영장에 취임하여 변창근(邊昌根)·홍 식(洪植)·최시흥(崔時興)·김창곤(金昌坤) 등과 함께 무력 투쟁을 전개하였다. 같은해 8월에 미국의원단이 한국을 방문하게 되자 김동삼(金東三)·이 탁(李鐸) 등과 협의하여 광복군을 국내에 파견, 일제의 고관과 중요 시설을 파괴함으로써 한국인의 자주성과 배일의식을 보여주고자 결의하였다. 그 구체적인 실천을 위하여 동년 7월에 안경신(安敬信)·임용일(林龍日)·정인복(鄭仁福) 등을 3대로 나누어 국내에 파견하였다. 안경신 일행은 입국 도중에 안주경찰서(安州警察署) 궁동종삼랑(宮東宗三郞)을 사살하고 평양에 들어가 평북경찰서로 사용될 신축 건물을 폭파하였다. 정인복 일행은 신의주(新義州)역에 폭탄을 투척하여 일부를 파괴하였고, 임용일 일행은 선천(宣川)경찰서를 폭파하였다. 이 사건으로 그는 궐석 재판에서 징역 10년형을 언도받았다.

1922년에 환인현 하구(桓仁縣河溝)에서 한족회·독립단·광복단·광복군총영 등 여러 단체가 통합하여 통군부(統軍府)를 조직하자 재무부장에 임명되어 군자금 모집에 온 힘을 경주하였으며, 이어 통군부가 대한통의부(統義府)로 개편된 뒤에는 교통부장·재무부장·군사위원장으로서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그후 통의부내에서 내분이 일어나 의군부(義軍府)가 생기는 등 분열 현상이 생기자 1925년 이청천(李靑天)·김동삼(金東三) 등과 함께 남만지역에 산재한 길림주민회·의성단·광정단 등을 규합하여 다시 정의부(正義府)를 조직하였다. 정의부에서는 처음 중앙행정위원으로서 이 탁(李 )·현정경·이진산(李震山)·김용대(金用大) 등과 함께 활동하였으며, 이어 재무부장으로서 군자금 조달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 후에는 군사부 위원장 겸 총사령관에 선임되어 일제와의 무력투쟁을 지휘하였으며, 1926년 초에는 정의부·신민부·참의부의 통합을 위해서 화전현(樺甸縣)을 근거로 통일된 연립내각을 구성하기도 하였다.

1925년 10월 10일에는 임시의정원에서 이 탁(李 )·김동삼(金東三)·이유필(李裕弼)·윤세용(尹世茸)·현천묵(玄天默)·윤병용(尹秉庸)·김좌진(金佐鎭)과 같이 국무원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취임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1926년 2월 18일에 해직되었다가, 1926년 10월 10일에 재임명되었다. 그러나 만주에서의 무장활동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에 상해에는 가지 않았다. 한편 1926년에 양기탁·고활신(高豁信)·현정경(玄正卿)·곽종대(郭鍾大), 천도교 혁신파인 김봉국(金鳳國)·이동구(李東求)·송 헌(宋憲) 그리고 노령에서 온 최소수(崔素水)·이규풍(李奎豊)·주진수(朱鎭秀) 등과 함께 길림성(吉林省) 영남(領南)호텔에 모여 고려혁명당을 조직하고 그 위원으로서 정의부의 당군을 지휘하였다. 또한 그는 교민들을 위해서 농촌의 개발과 농민의 경제적 지위의 향상, 교육 및 보건·위생 등에도 관심을 갖고, 1927년 4월 1일 김기풍(金基豊)·김진호(金鎭浩)·김이대(金履大)·김원식(金元植)·김 호(金虎)·김동삼·김정제(金定濟)·김유성(金有聲)·곽종경(郭鍾敬)·곽우명(郭宇明)·노영무(盧永武)·이 욱(李旭) 등과 함께 농민호조사를 조직하여 재만한교 2백만의 생활개선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1927년 12월 16일 길장선 흥도진역(吉長線興陶鎭驛)에서 밀정에게 속아 신의주 경찰대의 습격을 받고 체포되었다. 이후 장장 6년여의 재판 끝에 1932년 6월 24일 평양복심법원에서 무기형을 받았으며, 1928년 4월에는 정의부(正義府) 10중대원인 김여연(金汝連)·최봉복(崔鳳福) 등이 총사령관인 그를 구출하기 위하여 입국하다가 신의주에서 체포되었다. 그는 결국 상고를 포기하고 무기징역형이 확정되었으며, 1934년 7월 19일에 20년형으로 감형되기도 하였으나 모진 옥고 끝에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조선민족운동년감 34·46·71·79·203·206·210·215면
  • 고등경찰요사 116·117·118·119·124·125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259·260·262·269·270·271·302·442·472·474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91면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8권 56·276·284·322·429·436·639·708·758·830면
  • 기려수필 315면
  • 무장독립운동비사 57·58·61·64·71·126·128·135·138·144·191면
  • 한국민족운동사료(중국편)(국회도서관) 407면
  • 민족독립투쟁사사료(해외편) 35·148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2권 5·12·481·867·1010·1088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4권 297·351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5권 268·333·430·432·434·437·485·497·502·694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7권 466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9권 865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1권 651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4권 458·460·461·558·914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2권 334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1권 분책 694·708·710·712면
  • 동아일보(1926. 2. 17· 2. 28· 1927. 2. 11· 12. 19· 12. 24· 12. 28· 12. 29· 1928. 1. 8· 1. 19· 2. 8· 2. 11· 2. 12· 2. 13· 3. 12· 3. 18· 3. 21· 4. 17· 5. 15· 6. 19· 8. 30· 12. 19· 1929. 12. 9· 12. 11· 1930. 3. 29· 10. 16· 1931. 5. 11· 10. 9· 12. 22· 1932. 2. 23· 3. 6· 3. 23· 6. 22· 6. 25· 1934. 7.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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