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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2535
성명
한자 方順熙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임시정부 포상년도 1963 훈격 독립장

관련정보


2014년 05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1. 1938. 8 대한민국(大韓民國)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함경남도대의원(咸鏡南道代議員)으로 피선되어 해방에 이르기까지 재임(대의원증 제(代議員證第)22(號)) (한국독립운동사(韓國獨立運動史) p.371)
2. 1942. 5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중경구당 부간사(重慶區黨部幹事) 피선 (당원증(黨員證))
3. 1943. 10 대한민국애국부인회(大韓民國愛國婦人會) 부회장(副會長) 피임 (한국독립운동사(韓國獨立運動史) p.365 창립기념사진(創立紀念寫眞))
4. 1943. 6 한국 임시정부(韓國臨時政府) 선전부원(宣傳部員) 피임 (임명장(任命狀))
5. 1945 대한민국(大韓民國) 임시정부(臨時政府) 국내선전 연락원 피명, 선발대(先發隊)로 귀국 (임명장(任命狀))
증인(證人). 김학규(金學奎), 김홍일(金弘一), 조경한(趙擎韓), 문일민(文一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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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5권(1988년 발간)

함경남도 원산(元山) 사람이다.

일찍이 상경하여 정신여학교(貞信女學校)에 입학, 기독교정신에 입각한 주권의식과 애국사상을 터득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항상 포악무도한 일제의 만행을 응징해야 하겠다는 애국정열을 간직하고 있었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여성계몽운동에 앞장서 활동하다가 상해로 망명하였다.

1938년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함경남도 대의원에 선임되어 1945년까지 입법활동과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최초의 임시정부 여성의원으로 활약한 방순희는 의정원 회의에서 주미대표부 대표권을 둘러싼 김약산(金若山)파와의 대결에서 이를 압도하였다. 또 광복군 창설, 대일 대독 선전포고, 조소앙의 건국강령 등의 채택문제, 임시정부의 승인을 얻기 위한 노력 등 괄목할 만한 업적을 남겼다.

1939년에는 임정 승인을 위해 소련에 파견되어 외교활동을 펴기도 하였다.

1942년 5월에는 한국독립당 중경구당(重慶區黨) 간부로 선임되어 독립정신 고취, 군자금 모집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43년 10월에는 중경에서 대한민국애국부인회 부회장에 선출되어 여권운동도 겸하였으며 한국임시정부 선전부원으로 한국어 방송을 하면서 활약하였다.

1945년 광복이 되자 임시정부 국내 연락원으로 임명되어 선발대로 귀국하였다.

정부는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365, 371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56면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13권 269, 318, 494, 610면
  • 임시정부의정원문서(국회도서관) 243, 244, 258, 259, 270, 276, 279, 307, 308, 313, 415, 452, 463, 465, 466, 473, 474, 477, 482, 483, 496, 498, 542, 586, 587, 588, 599, 602, 604, 606, 608, 609, 633, 634, 636, 638, 689, 858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4권 721, 1031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6권 160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방순희 방순희(方順嬉), 방순이(方順伊), 방희(方姬) 함남 원산(元山) -
본문
1904년 1월 30일 함경남도 원산부(元山府) 남산동(南山洞)에서 방도경(方道京)과 김복녀(金福女)의 1남 1녀 중 맏딸로 태어났다. 본관은 온양(溫陽)이다. 이명은 방순희(方順嬉)·방순이(方順伊)·방희(方姬) 등이다. 1911년 가족과 함께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하여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新韓村) 아무르스카야(Amurskaya)에 정착하였다. 부친은 물산 객주를 차리고 이주 한인들을 상대로 상품 위탁판매와 여관업 등에 종사하였다.블라디보스토크의 러시아계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등과정은 신한촌의 삼일여학교(三一女學校)에 진학하였다. 삼일여학교를 졸업하자 부친이 한인 동포 자제들을 가르치는 교사가 될 것을 권유하여, 1918년 서울의 정신여학교로 유학하였다. 1923년 정신여학교를 제15회로 졸업하고,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가 2년 동안 신한촌의 백산학교(白山學校) 교사로 한인 2세들을 가르쳤다. 그러나 소련 당국이 민족교육을 인정하지 않고 동화교육을 강요함에 따라 백산학교는 문을 닫았다.이 무렵 고려공산당 간부 이백초(李百草)와 결혼했으나 남편이 투옥되면서 모종의 임무를 띠고 1925년 8월 24일 귀국하였다. 새로 개관한 소련영사관의 통역으로 근무하다가 1개월 만에 사직하였다. 당시 정동에서 열린 소련영사관 개관식에 ‘하얀 한복’을 입고 참석하여 이목을 끌었다.서울 종로 체부동(體府洞)에 기거하면서 북풍회(北風會)의 선전활동에 참여하였다. 1925년 10월 31일 제동齊洞에서 개최된 경성청년회(京城靑年會) 월례회의에 북풍회 여성단원의 신분으로 참석하였다. 치안유지법이 제정되면서 친소련 공산주의 인물로 분류되어 ‘요주의(要注意)’ 감시 대상이 되었다.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인 박희도(朴熙道)의 의용대장 임명장을 전달한 혐의로 종로경찰서 고등계에 붙잡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입국한 이유 등에 대해 이틀간 조사받으며 고초를 겪었다.일제의 감시가 심해져 국내에서의 활동이 불가능해지자 만주를 경유해 상하이(上海)로 탈출하였다. 1931년 신의주형무소에 복역 중 병보석을 받아 상하이로 탈출한 현익철(玄益哲)과 결혼하였다. 이후 현익철은 1938년 5월 6일 후난성(湖南省) 창사(長沙) 남목청(楠木廳) 6호에서 열린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의 통일회의 자리에 난입한 이운한(李雲漢)의 총격에 급사하였다.1939년 10월 3일부터 12월 5일까지 쓰추안성(四川省) 치장현(綦江縣) 린장제(臨江街) 43호에서 개최된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제31회 정기회의에서 함경도의원으로 선출되어 주미대표부 대표권 문제와 광복군 창설, 대일·대독선전포고 및 건국강령채택문제 등과 관련한 입법 활동을 전개하였다. 1939년 임시정부가 미·영·소·중 등 연합국 정부의 승인을 얻기 위한 대표를 선임할 당시 소련 대표로 충칭(重慶) 소련대사관을 상대로 외교활동을 펼쳤다.1939년 김관오(金冠五)와 재혼하였으며, 한국독립당의 중앙조직부 제1구에 소속되어 활동하였다. 1940년 한국독립당 제1차 중앙집행위원회에서 의결된 광복군 공약 3조를 임시의정원에서 통일전선 체제에 맞도록 수정해 법령으로 공포하고자 하였다. 1940년 6월 16일 충칭에서 한국독립당 조직부의 지도와 원조 하에 한국혁명여성동맹(韓國革命女性同盟)이 창립될 때 집행위원장 겸 서무부 주임에 선임되었다.1942년 10월 25일에 충칭시 오사야항(吳師爺巷) 1호 건물에서 개최된 제34차 임시의정원 회의에서는 유일한 여성 의원으로 활동하였다. 이때 남편 김관오도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합류하였다. 임시의정원 의원들과 공동으로 ‘광복군9개행동준승(光復軍9個行動準繩)’ 취소안을 상정하였으며,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의 지위를 태평양전구 중국군사령관장관에게 위임할 것 등을 내용으로 하는 수정안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각국을 상대로 한 임시정부의 승인 요구안을 상정해 통과시켰다.1942년 한국독립당의 충칭구 당부 간사에 선임되었다. 1943년 3·1절 기념대회에서 임시정부 외무부장 조소앙(趙素昻)의 개회사에 이어 한국애국부인회(韓國愛國婦人會) 대표로 3·1절 기념사를 낭독하였다. 8월 19일에 열린 국무회의에서 생계부 생활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42년까지 임시의정원의 유일한 여성의원으로 1945년 9월까지 함경도 대표의원으로 의정활동을 계속하였다.1943년 2월 23일 한국혁명여성동맹 창립과 활동을 기반으로 각 정파의 여성 50여 명이 한국애국부인회를 재건하였는데, 부주석에 선임되어 “국내외 부녀는 총단결하여 전민족해방운동과 남녀평등이 실현되는 민주주의 신공화국 건설에 적극 참가하여 분투하자”는 행동 강령을 선포하였다. 또한 국내외 동포 여성들에게 민족적 각성을 촉구하며 독립운동 참여를 호소하였다. 한국애국부인회는 독립의연금을 모금하고 대일전선에서 부상당한 군인들과 광복군을 위문하였으며, 해외 각지에 흩어진 한인 여성단체들에게 임시정부 지지를 호소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1943년 종전 후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 계획이 미국 시카고의 『SUN(太陽報)』지에 보도되자, 충칭의 각 정당과 혁명 단체의 대표 300여 명은 1943년 5월 10일 재중자유한인대회(在中自由韓人大會)를 개최하였다. 재중자유한인대회에서 여성을 대표하여 ‘절대 독립’을 주창하는 연설을 하였다.1943년 6월 1일 국무회의에서 선전부 선전과 과원으로 선임되었다. 1944년 중국 국민당정부와 임시정부 간의 협조로 결성된 대적선전위원회(對敵宣傳委員會)에서 일본 군대로 끌려온 한국인 사병들을 위해 한국어로 일본군의 만행을 알리고 반일의식을 고취하는 방송을 하였다. 이와 함께 일본군 포로수용소를 찾아가 한국 국적의 사병들을 위문하였고 나아가 항일전선의 군인들을 격려하였다.1945년 8월 15일 광복 후 임시정부 국내선전연락원으로 임명되었으나, 귀국하지 않고 중국 각지에서 선무공작을 펼쳤다. 윈난성(雲南省) 라멍(拉孟, 통칭 松山)과 텅웨이(騰越) 지역의 일본군 위안소를 탈출해 쿤밍(昆明)의 포로수용소에 수용된 한국 출신 23명의 위안부 여성들이 임시정부로 인계되자 고국으로 귀환하기까지 이들을 보호·교육하는 임무를 담당하였다. 1946년 4월 26일 이범석(李範錫)이 이끄는 한국광복군 제2지대원들과 미군 LST편으로 귀국하였다.1948년 4월 14일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회가 조직을 5분과(재무·정치·문화·후생·국방) 8부(비서부·조직부·선전부·청년부·훈련부·재정부·노동부·부인부)로 개편할 때, 부인부 책임을 맡았다. 남편 김관오는 6·25전쟁 당시 육군사단장과 유격사령관으로 복무한 다음 육군준장으로 예편하였으며, 1965년 사망하였다. 남편과 사별한 후 신앙생활에 열중하던 중 1979년 5월 4일 사망하였다.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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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묘지 대전현충원 대전광역시 유성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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