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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 7월 25일 경상북도 예천군(醴泉郡) 용문면(龍門面) 하금곡동(下金谷洞)에서 권영진(權永鎭)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예천(醴泉)이며, 자는 도장(道壯)이고, 호는 중산(重山), 이명은 권세형(權世衡)·엄시일(嚴時一)이다. 조선 중종 때 문신 졸재(拙齋) 권오기(權五紀)의 14대손이다.
어릴 때 집에서 한학을 수학하고, 김동삼(金東三)·유인식(柳寅植)·김후병(金厚秉) 등이 설립한 안동 협동학교(協東學校)를 졸업하였다. 1915년 서울에 있는 중앙고등보통학교(中央高等普通學校)에 입학하였으나 1917년 퇴학하였다. 같은 해 4월 부산공립상업학교(釜山公立商業學校)에 입학하여 1918년 2학년 재학 중 퇴학하고 귀향하였다.
1919년 6월 최재화(崔載華)는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로부터 국내 청년들을 모집하여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로 보내라는 지령을 받았다. 이때 최재화에게 포섭된 상주(尙州)의 조성순(趙誠淳)·유우국(柳佑國)·배승환(裵昇煥) 등이 경북 일원에서 모집한 예천의 이재영(李縡榮), 상주의 조태연(趙台衍), 안동의 권재수(權在壽), 동래 기장(機張)의 김종엽(金鐘燁)·천세환(千歲桓) 등과 함께 만주로 파견되었다. 그해 8월 김종엽 등과 함께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하여 1920년 1월 하순 제4기생으로 졸업하였다.
1920년 2월 김종엽과 함께 군자금 모집을 위해 국내로 잠입하였다. 그리고 국내 총책 대동단(大同團) 외교원 김병두(金炳斗)와 연결하여 대동단에서 발행한 「독립운동자금모집영수증(獨立運動資金募集領收證)」을 소지하고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다가 경북 왜관(倭館)에서 경북 경찰부에 체포되었다. 이른바 제2의 최재화 사건(崔載華事件)이다. 1920년 9월 24일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 및 사기죄로 검찰에 송치되어 그해 12월 20일 대구지방법원 예심을 거쳐 1921년 2월 22일 대구지방법원 2심에서 징역 2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겪은 뒤 1922년 8월 출옥하였다.
1923년 11월 조직된 서울청년회 계열의 적박단(赤雹團) 부단장(副團長)으로 활동하는 한편, 1924년 3월 조직된 용문청년회(龍門靑年會)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1925년 4월 17일에는 조선사회운동자동맹발기준비위원회(朝鮮社會運動者同盟發起準備委員會)에 참여하여 사회주의 운동을 전개하였다. 1926년 2월 박창호(朴昌鎬) 등과 함께 예천에서 사상 단체 정진회(正進會)를 결성하였고, 1927년 5월 16일 조선사회단체중앙협의회(朝鮮社會團體中央協議會) 창립대회에 용문청년회 대표로 참가하였다. 그해 6월에는 서울청년회 계열의 예천청년연맹(醴泉靑年聯盟)과 화요회 계열의 신흥청년회(新興靑年會)를 결합한 예천청년동맹(醴泉靑年同盟)을 박창호·김상기(金相起) 등과 함께 창립하였으며, 9월에는 신간회(新幹會) 예천지회(醴泉支會) 결성을 주도하였다. 한편, 1928년 3월부터 『동아일보(東亞日報)』 예천지국(醴泉支局)의 기자로 활동하면서 농민운동에 참여하였다. 1927년 11월 16일 조직된 예천농민조합(醴泉農民組合)의 임시의장을 맡았고, 1929년 8월에는 예천농민조합 중앙위원장을 맡아 농민운동을 주도하였다.
1932년 11월 한일청(韓一淸, 1899~1960)·박창호·김기석(金己石)·황창섭(黃昌燮, 1896~1949)·윤우식(尹雨植, 1909~1934) 등이 조직한 예천무명당(醴泉無名黨)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34년 3월 이른바 예천무명당 사건으로 경북 경찰부에 체포되어 1935년 5월 10일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대구지방법원 형사부에서 징역 1년 6개월 형을 선고받고 옥살이를 하였다. 1936년 5월 29일 서거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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