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번호 | 194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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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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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閔良基 |
이명 | 없음 | 성별 | 남 |
생년월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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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년월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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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적 | |||
주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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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계열 | 만주방면 | 포상년도 | 1962 | 훈격 | 독립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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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도 해주(海州) 사람이다.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한 후 만주로 망명하였으며, 1920년 대한독립단에 가입하여 동지 이명서(李明瑞)·이근영(李根永)·박기수(朴基洙) 등과 함께 무장활동의 임무를 띠고 동년 6월 만주 관전현(寬甸縣)을 출발하여 황해도 지역에 파견되었다.
이들은 동년 8월경 주의환(朱義煥)·이지표(李芝杓)·원사현(元士賢)·박지영(朴枝英)·고두환(高斗煥) 등과 함께 송화군 구월산(松化郡九月山)에서 무장독립대를 결성하고 인근 전역에 독립단 기관을 조직하였다.
동년 8월 15일에는 김난섭(金蘭燮)·홍원택(洪元澤)·박능묵(朴能默)·박형진(朴炯鎭)·이현규(李鉉奎) 등 여러 동지와 함께 친일파인 은율(殷栗) 군수(郡守) 최병혁(崔丙赫)을 주살하는 한편, 주재소를 습격하여 일시 점령하고 주위의 전선을 끊어 사방 연락을 차단한 다음 일행은 구월산 남부면 개원리(南部面開元里)로 피신하였다.
그런데 9월 10일 불의에 일경에 포위를 당하게 되었다. 4, 5시간 동안 격전을 벌인 결과 적 20여명을 사살하고 중과부적으로 이명서 대장을 위시하여 박기수·주의환·원사현·이지표·이근영 등이 전사하고 그는 고두환·박지영 등과 함께 중상을 입고 체포되었다.
그리하여 1921년 11월 30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어 1922년 2월 25일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사형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