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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960193
성명
한자 李炳寬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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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1997 훈격 대통령표창
1919.3.5 서울 남대문역(南大門驛)에서 오세창(吳世昌) 등 여러 동지들의 학생단(學生團) 제2회 독립만세시위운동에 참여하여 독립기(獨立旗)를 받들고 적포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고창하는 등 활동하다가 피체되어 징역6월에 집행유예3년을 받았으나 미결 8개월여간의 옥고를 치른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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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4권(2000년 발간)

전북 옥구(沃溝) 사람이다.

1919년 3월 5일 중앙학교 학생으로 서울역 앞에서 벌어진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3월 4일, 서울지역 학생들은 비밀리에 회합을 거듭하여 3월 5일 대대적인 시위운동을 계획하였다. 3월 5일 아침 예정대로 서울역 광장에서 일대 시위운동이 전개되었다. 약속한 시간이 되자 서울역 광장에는 시위 군중이 점점 모이기 시작하였다. 대부분 학생들이었고 그외 다수의 청년들이 참가하였다. 중앙학교 3년생이었던 이병관도 참가하였다.

강기덕과 김원벽이 독립기를 들고 선두에 섰다. 그 뒤를 학생·군중들이 만세를 고창하며 태극기를 흔들고 남대문쪽을 향해 나아갔다. 시위행렬이 남대문 안으로 들어서자 경비중이던 일경이 이를 저지하였다. 그러나 약 10,000여 명으로 늘어난 시위군중은 이 저지선을 뚫고 행진을 계속하였다. 그런데 강기덕과 김원벽 등 50여 명이 지원나온 일경에게 붙잡혔지만, 시위행진은 계속되었고 보신각에 다다랐을 때 더욱 증강된 경찰대가 총검을 휘두르며 강제 해산시켰다. 이 과정에서 많은 학생들이 중상을 입고 75명이 종로 경찰서로 연행되었다. 이병관은 3월 9일 고향으로 내려가기 위해 서울역에 갔다가 붙잡혔다.

이해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으로 징역 6월,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7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3卷 525面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13輯 94∼121·142面
  • 韓民族獨立運動史資料集(國史編纂委員會) 第17輯 59面
  • 韓民族獨立運動史資料集(國史編纂委員會) 第18輯 268·269面
  • 中央60年史(中央校友會, 1969) 104面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5輯 58∼82·95∼99面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이병관 - 전북 옥구(沃溝) 1919년 3월 서울 만세운동
본문
1900년 12월 21일 전라북도 옥구군(沃溝郡)(현 군산시) 임피면(臨陂面) 읍내리(邑內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당시 중앙학교(현 중앙고등학교) 3학년에 재학 중으로 서울 종로(鐘路) 재동(齋洞)에 있는 하숙집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 해 3월 5일 남대문역(南大門驛, 현 서울역) 앞에서 있었던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1919년 3월 1일 서울 등지에서 만세운동이 시작된 이후, 3월 4일 서울 지역의 중등학교 학생 대표들이 정동(貞洞) 배재고등보통학교(培材高等普通學校) 기숙사에서 학생단(學生團)의 이름으로 비밀리에 모임을 가졌다. 이 때 이를 주도한 것은 3월 1일의 첫 시위에 주도적으로 참가했던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 학생 김원벽(金元璧)과 보성법률상업학교(普成法律商業學校) 학생 강기덕(康基德), 그리고 경성의학전문학교(京城醫學專門學校) 학생 한위건(韓偉健) 등이었다. 이들은 3월 5일 오전 8시 반까지 남대문역 광장에 집합할 것을 결의하였다.3월 5일 남대문역에 모인 학생 시위대는 그날 아침부터 만세를 크게 외치며 남대문 쪽을 향하여 행진을 시작하였다. 이때 정석도(鄭石道)·조무환(曹武煥)·이국수(李掬水) 등 같은 중앙학교 학생들과 함께 만세시위에 동참하였다. 붉은색 완장을 팔에 두르고 독립선언서와 여러 격문을 남대문역 주변을 오가는 일반 군중에게 배부하였다. 고종 장례를 보고 귀향하고자 하는 남대문역 주변에 모였던 군중들이 시위 행렬에 합류하면서 시위대는 약 1만 명으로 늘어났다. 이후 시위 행렬은 두 갈래로 나뉘었는데, 이때 남대문을 지나 태평통(太平通, 현 태평로), 대한문(大漢門) 앞을 거쳐 보신각(普信閣) 방향으로 향하는 대열에 합류하였다. 그러나 이때 출동한 일제 군경의 무력 진압으로 시위대가 해산되었다.그 후 고향 옥구 지역에 서울에서의 만세시위 소식을 전하고 그곳에서 다시 만세시위를 계획하고자 고향으로 내려가는 기차를 타러 남대문역으로 갔다가 그 곳에서 일제 경찰에 의해 붙잡혔다.오랜 조사로 고초를 겪다가, 1919년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미결구류일수 중 90일 본형 산입)에 집행유예 3년을 받고 풀려났다.대한민국 정부는 199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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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출판법위반, 보안법위반 경성지방법원의 공판에 부침 경성지방법원 1919-08-30 국가기록원
2 판결문 보안법위반 징역 6월, 3년간 집행유예, 미결구류일수 90일 본형에 산입 경성지방법원 1919-11-06 국가기록원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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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대전현충원 대전광역시 유성구
국립묘지 안장자 위치정보 시스템 바로가기

관련 현충시설 정보

도움말
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장소 보신각 3·1독립운동 기념터 서울특별시 종로구
2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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