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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9081
성명
한자 朴快仁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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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1993 훈격 애족장
1919. 3. 1 경성고등보통학교(京城高等普通學校) 제3학년 재학시 서울 파고다공원에서 다수의 군중과 함께 종로, 남대문, 대한문, 의주로 등지로 향하여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행진하다 피체되어 징역 8월을 받고 1년 1월간 옥고를 치른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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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1권(1994년 발간)

충남 당진(唐津) 사람이다.

1919년 3월 1일 경성고등보통학교(京城高等普通學校) 3학년생으로 서울 탑동(塔洞)공원에서의 독립선언식에 참가하여 다수의 군중과 함께 공원 밖으로 나와 종로(鍾路), 남대문(南大門), 대한문(大漢門) 등지로 향하여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행진을 벌이다가 붙잡혔다.

그 해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을 받아 공소하였으나, 1920년 2월 2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어 1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판결문(1919. 11. 6 경성지방법원)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832∼852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2권 105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5집 58∼82·155∼184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13집 94∼121면
  • 신분장지문조회회보서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106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9권 174·183·187·200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박쾌인 - 충남 당진(唐津) 서울 탑골공원 만세운동
본문
1898년 11월 6일 충청남도 당진군(唐津郡) 이배면(螭背面) 읍내리(邑內里)에서 태어났다. 서울의 경성고등보통학교(京城高等普通學校, 현 경기고등학교)에 진학하여 학업을 계속하던 중, 1919년 서울 만세운동 준비 과정에서 경성고등보통학교의 중심 인물로 활동하였다.1919년 2월 초순부터 보성고등보통학교(普成高等普通學校, 현 보성고등학교) 4학년 장채극(張彩極)과 함께 현재의 세계 정세와 일본의 도쿄(東京)에서 일어난 유학생들의 독립선언 등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고, 한국에서도 독립운동을 일으켜야 한다는 것에 서로의 의견을 일치시켰다.직접적으로 만세운동의 준비 과정에 참여하게 된 계기는 3명의 학생 대표 중 한사람이었던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의 김원벽(金元璧)을 통해서였다. 2월 중순 서울 종로 기독교청년회관에서 6일간 시국대강연회가 열려 암암리에 우리 민족의 처지를 알리고 독립사상을 고취하고 있었다. 이 시국대강연회에 학우들과 함께 참여하던 중 강연자의 한사람이었던 김원벽의 강연 속에 담긴 독립사상에 공감하여 강연 후 김원벽에게 면담을 요청하여 한국의 독립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였다. 이때 김원벽은 지금 독립운동을 계획하고 있으니, 나중에 알려주겠다고 하였다.2월 23일 기독교계의 박희도(朴熙道)는 김원벽을 만나 각 학교 대표자들이 종교계 대표들과 연합하여 독립운동을 추진할 것을 종용하여 승낙을 얻었다. 종교계 지도자들은 3월 초 독립선언을 하고 시위운동을 개시한다고 결정하여 학생들에게 통고하였다.학생 대표들은 2월 25일과 26일 정동예배당의 이필주(李弼柱) 목사 방에서 회의를 진행하여 3월 1일 각 전문학교와 중등학생은 모두 탑골공원에 집합하여 만세시위에 참가하도록 하여 대규모 독립 시위 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에 따라 전문학교의 학생 대표들은 각각 비밀리에 중등학교별로 중심 인물을 찾기 시작하였다. 이 결과 전문학교 학생보다 많은 수의 중등학생이 운동의 전위대로 참가하게 되었다.이 과정에서 김원벽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경신학교(儆新學校, 현 경신고등학교)의 강우열(康禹烈)•신창준(辛昌俊)과 함께 준비 과정에 참여하게 되었다. 구체적인 활동은 각 학교의 대표자를 통해 전달되었다. 경성고등보통학교의 대표는 4학년 김백평(金栢枰)이었다. 2월 28일 학생 대표 회의에서 독립선언서 약 200장을 받은 김백평은 그날 밤 경성고등보통학교의 간부회의를 소집하였다. 이에 박노영(朴老英)과 함께 회의에 참석하여 전체 학생 대표 중 한사람인 강기덕(康基德)의 전달 사항을 공유하고, 독립선언서를 나눠 갖는 동시에 다음날 탑골공원으로 모이는 방법을 논의하였다.다음날인 3월 1일 김백평·박노영과 함께 등교하여 점심시간 전에 모든 학생을 각 교실에 모이게 하였다. 비밀 누설을 방지하기 위하여 복도와 교실의 출입문 등에 보초를 세운 후, 오후 2시를 기하여 탑골공원에서 손병희(孫秉熙) 등 민족대표가 독립을 선언하니, 오후 1시에 신호를 하면 자신들을 따르라고 하였다. 교정에서 국장(國葬) 참례 예비 연습이 끝난 직후, 김백평·박노영과 함께 전교생을 교문 앞에 집결시켜 선두에 서서 인솔하여 독립선언식이 예정된 탑골공원으로 향하였다. 탑골공원으로 가는 길에 전날 받은 독립선언서를 인사동(仁寺洞)·낙원동(樂園洞)·관훈동(寬勳洞) 등지에서 시민들에게 배포하였다.탑골공원에서 개최된 독립선언식에 참석한 후, 곧바로 경성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을 지휘하여 만세시위 행렬에 참여하였다. 학우들과 함께 서울 시내의 시민들에게 만세운동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면서,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며 광화문(光化門)·종로(鐘路)·남대문(南大門) 일대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날의 만세시위 이후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1919년 8월 3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공판 장소를 경성지방법원으로 결정하는 판결을 받고,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8월(미결구류일수 120일 본형 산입)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1920년 2월 2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미결구류일수 60일 본형 산입)되어 옥고를 겪었다. 같은해 4월 29일 사면령으로 출옥하였다.출옥 이후 귀향하여 당진향교(唐津鄕校)에서 학생들을 교육하며 후진 양성에 노력하였다.대한민국 정부는 199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도움말
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출판법위반, 보안법위반 경성지방법원의 공판에 부침 경성지방법원 1919-08-30 국가기록원
2 판결문 보안법위반, 출판법위반 징역 8월, 미결구류일수 120일 본형에 산입 경성지방법원 1919-11-06 국가기록원
3 판결문 보안법위반등 공소 기각, 미결구류일수중 60일 본형에 산입 경성복심법원 1920-02-27 국가기록원
4 인물카드 보안법위반 징역8월 경성복심법원 1920-02-27 국사편찬위원회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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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서울현충원 서울특별시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안장자 찾기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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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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