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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6년 11월 6일 황해도 해주군(海州郡) 서변면(西邊面) 선산리(仙山里)에서 태어났다. 경신학교를 졸업했으며 만세시위 당시 해주지역 교회의 전도사였다.
1919년 2월 8일 일본 도쿄(東京)의 한인 유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다는 소식이 서울에 전해졌다. 일본에서 유학생이 전개한 2.8 독립선언서 낭독에 고무된 학생들은 서울에서도 독립선언서를 작성하고 만세시위를 벌일 것을 계획하였다. 그 계획에는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의 이용설(李容卨)‧김문진(金文珍)‧김대우(金大羽), 경성의학전문학교의 김형기(金炯璣)‧한위건(韓律健), 보성법률상업전문학교 졸업생 주익(朱翼), 연희전문학교의 김원벽(金元璧) 등이 참여하였다. 2월 20일 학생대표들은 서울 숭동 예배당에서 제1회 학생지도자 회의를 개최하였다.
한편 민족대표의 일원으로 만세시위를 계획하고 있던 박희도(朴熙道)는 2월 23일 경 김원벽에게 3월 1일에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할 뜻을 전달하였다. 2월 25일 정동 예배당 구내 이필주(季弼柱) 목사 집에 모인 학생대표들은 3월 1일 오후 2시에 탑골공원(구 파고다 공원)에 모여서 독립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의하였다. 이에 학생 대표들은 학연, 지연 등을 활용해서 전문학교뿐만 아니라 중등학교 재학생들에게도 3월 1일 만세시위 계획을 알리고 참여를 독려하였다.
이러한 때에 민족대표들은 전국에 산재해 있는 천도교, 개신교, 불교의 주요 인사들에게 해당 지역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도록 독려하였다. 또 인편을 통해서 독립선언서를 각 지역의 천도교, 개신교, 불교계 인사들에게 배포하였는데 2월 28일 아침 종로의 중앙예배당 사무실에서 민족대표 김창준 목사로부터 독립선언서 수백 장을 받아서 경성역으로 가서 원산으로 향하는 곽명리(郭明理)에게 전달하였다고 한다. 다만 곽명리는 같은 날 서울에서 오희영에게 독립선언서 300장을 받았다고 검찰조사 과정에서 진술하였다.
2월 28일 오후 7시경에 정동 예배당에서 이규갑(李奎甲)과 함께 최성모(崔聖模)‧박희도‧이필주(李弼柱)‧오화영(吳華英) 등을 손병희(孫秉熙)의 집으로 인도하는 역할을 맡았다.
한편 일제 군경들은 도쿄 유학생들의 2.8 독립선언서 발표 이후 학생들과 민족지도자들의 활동을 예의주시하였다. 그러던 중 2월 28일 밤중에 일제 군경들은 서울 일대에서 독립선언서를 발견하였다. 이에 3월 1일 오전 10시를 전후로 일제 군경이 대대적인 수색을 전개하였다. 상황이 급박해지자 민족대표 33인은 인사동 태화관(泰和館)에서 조선독립선언서를 낭독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날 오전 9시경에 박희도에게 독립선언서의 선언 장소가 태화관으로 변경되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박희도는 장소 변경의 이유로 고종이 일본인에 의해서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유포되어서 군중들의 비애가 심해진 마당에 만세시위를 전개한다면 일본 군경과 충돌에 따른 희생이 염려된다는 것이었다.
3월 1일 오후 2시 학생대표들은 탑골공원에서 독립만세시위를 시작하였다. 그런데 명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민족대표들이 탑골공원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로 인해 학생들 사이에 혼란이 발생하였다. 그때 팔각정 단상으로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시위를 이끌었다고 한다. 다만, 탑골공원의 만세시위에 참여한 인사들은 신문조서에서 조선독립선언서를 낭독한 이의 인상착의를 30~40대 남성으로 한복 혹은 두루마기를 입고 중절모자를 썼다고 진술하기도 하였다. 일제 군경 및 당국자들은 탑골공원에서 조선독립선언서를 낭독한 인물의 신원을 정확하게 밝히지는 못하였다. 독립선언서 낭독이 끝나자, 최현(崔鉉)과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최성모의 장남인 최경환(崔景煥)과 함께 학생들의 선두에서 행진하였다. 시위대는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서울 시내 일대를 행진하면서 일제 군경을 상대로 가두투쟁을 전개하였다.
한편, 학생 대표들은 3월 5일 학생단 중심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3월 5일 오전 9시부터 시작한 시위에는 5,000여 명이 넘은 인원이 참여하였으며, 시위대는 남대문 일대에서 일제 군경과 충돌하였다. 그 과정에서 강기덕과 김원벽이 일제 군경에게 붙잡혔지만, 학생들은 대한문 앞과 남대문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독립선언서를 군중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1919년 3월에는 이규갑과 함께 서울에서 머물러 있다가 4월경에 고향인 황해도 해주로 내려갔다. 상하이(上海)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밀파된 최일(崔日), 러시아지역 독립운동 조직의 연락책인 간병제(簡秉濟), 평양의 연락책인 황보덕(皇甫德)에게 국내외 독립운동 상황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전희철(田熙哲)‧이덕봉(李德鳳)‧김영호(金永浩)와 함께 신문 혹은 격문을 제작하여 해주 일대에 붙였다. 그러다가 전희철이 간병제로부터 격려문을 받아서 오던 중에 일제 군경에게 붙잡히면서 결국 발각되었다. 이후 해주지방법원에서 2년 6월을 받아 옥고를 겪었다.
풀려난 후, 의용대를 조직해서 서광신(徐光信)·이기춘(李起春) 등과 독립운동을 전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함흥 학병의 탈출을 주도한 혐의로 붙잡혔던 임영선(林永善)은 경신학교 재학 중에 교사 도상봉(都相鳳)·김건(金建)으로부터 경신학교 출신 독립운동가들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는데, 그중에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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