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2권(1986년 발간)
평안북도 정주(定州) 사람으로 3·1운동 당시 중앙지도체 인사 중의 한 사람이다.
1910년(융희 4) 오산학교(五山學校)를 졸업, 이듬해 경기도 삼악학교(三岳學校) 교사가 되고, 1912년 만주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교사가 되었다. 이듬해 다시 오산학교로 돌아왔다가, 1916년 일본 정칙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에 입학했다. 그 후 귀국하여 1918년 재령(載寧)의 명신 중학교(明新中學校)에서 지리와 역사 교사로 재직하였다.
1919년 2월 상순, 최 린(崔麟)·최남선(崔南善)·송진우(宋鎭禹) 등이 모여 거족적인 독립만세 운동을 계획할 때, 최남선이 기독교측의 인물과 교섭하기로 하고, 먼저 자기와 잘 알던 정주군 기독교(基督敎) 장로교의 장로인 이승훈(李昇薰)에게 연락하기로 하였다.
이에 최남선은 2월 7일 현상윤(玄相允)으로 하여금 이승훈이 설립한 오산학교 경영을 핑계로 상경하도록 하라는 연락을 부탁하니, 현상윤은 정노식(鄭魯湜)의 집에 머무르고 있던 정주군 사람인 김도태에게 이 연락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이에 그는 2월 8일 서울을 출발하여 이튿날 정주에 도착하여 이승훈의 집으로 가던 중, 잘 알고 있던 오산학교 교사 박현환(朴賢煥)을 만나 이승훈이 선천(宣川)에 가고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즉시 박현환에게 최남선의 연락사항을 알리고 선천에 가서 이승훈에게 연락하도록 하였다. 이런 연락을 받은 이승훈은 이 달 11일 급히 상경하여 최남선과 만나, 기독교측도 참가하는데 동의함으로써 3월 1일 거족적인 독립만세운동이 가능할 수 있었다.
그러나 김도태도 결국 체포되어 손병희(孫秉熙) 등 민족대표들과 함께 소위 보안법 위반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재판을 받았으나,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 석방되었다.
1921년 휘문중학교(徽文中學校) 교사를 지냈고, 1945년 경성여자상업학교(京城女子商業學校 : 현 서울女商) 교장에 취임, 재직 중 조선지리학회(朝鮮地理學會) 회장, 1949년에는 공군사관학교(空軍士官學校) 교수 등을 역임하였고 서울여상의 교장으로 여생을 마쳤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권 13·15·27·29·40·41·52면
- 고등경찰요사 17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820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8권 514·565·600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9권 130·166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96·148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권 69·9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