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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8538
성명
한자 金道泰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1990 훈격 애국장
1919. 2. 8. 3.1운동의 48인중 1인이며 당시 민족대표들의 거사계획을 평북 정주의 이승훈(李昇薰)에게 전달하여 민족적 대봉기(大峰起)성공리(成功裡)에 추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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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2권(1986년 발간)

평안북도 정주(定州) 사람으로 3·1운동 당시 중앙지도체 인사 중의 한 사람이다.

1910년(융희 4) 오산학교(五山學校)를 졸업, 이듬해 경기도 삼악학교(三岳學校) 교사가 되고, 1912년 만주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교사가 되었다. 이듬해 다시 오산학교로 돌아왔다가, 1916년 일본 정칙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에 입학했다. 그 후 귀국하여 1918년 재령(載寧)의 명신 중학교(明新中學校)에서 지리와 역사 교사로 재직하였다.

1919년 2월 상순, 최 린(崔麟)·최남선(崔南善)·송진우(宋鎭禹) 등이 모여 거족적인 독립만세 운동을 계획할 때, 최남선이 기독교측의 인물과 교섭하기로 하고, 먼저 자기와 잘 알던 정주군 기독교(基督敎) 장로교의 장로인 이승훈(李昇薰)에게 연락하기로 하였다.

이에 최남선은 2월 7일 현상윤(玄相允)으로 하여금 이승훈이 설립한 오산학교 경영을 핑계로 상경하도록 하라는 연락을 부탁하니, 현상윤은 정노식(鄭魯湜)의 집에 머무르고 있던 정주군 사람인 김도태에게 이 연락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이에 그는 2월 8일 서울을 출발하여 이튿날 정주에 도착하여 이승훈의 집으로 가던 중, 잘 알고 있던 오산학교 교사 박현환(朴賢煥)을 만나 이승훈이 선천(宣川)에 가고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즉시 박현환에게 최남선의 연락사항을 알리고 선천에 가서 이승훈에게 연락하도록 하였다. 이런 연락을 받은 이승훈은 이 달 11일 급히 상경하여 최남선과 만나, 기독교측도 참가하는데 동의함으로써 3월 1일 거족적인 독립만세운동이 가능할 수 있었다.

그러나 김도태도 결국 체포되어 손병희(孫秉熙) 등 민족대표들과 함께 소위 보안법 위반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재판을 받았으나,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 석방되었다.

1921년 휘문중학교(徽文中學校) 교사를 지냈고, 1945년 경성여자상업학교(京城女子商業學校 : 현 서울女商) 교장에 취임, 재직 중 조선지리학회(朝鮮地理學會) 회장, 1949년에는 공군사관학교(空軍士官學校) 교수 등을 역임하였고 서울여상의 교장으로 여생을 마쳤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권 13·15·27·29·40·41·52면
  • 고등경찰요사 17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820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8권 514·565·600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9권 130·166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96·148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권 69·91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도태 - 평안북도 정주(定州) 3.1운동
본문
1891년 9월 11일 평안북도 정주군(定州郡) 아이포면(阿耳浦面) 대산동(大山洞)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김낙서(金洛西), 어머니는 이낙영(李洛永)이고 아내는 김애환(金愛煥)이다. 1910년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1911년 죽산군(竹山郡)의 사립 삼악학교(三岳學校) 교원이 되었다. 1912년 만주 신흥강습소 교사가 되었다가 이듬해 오산학교로 돌아왔다. 1916년 12월에는 일본 도쿄(東京) 세이소쿠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에 입학하였다. 1918년 귀국하여 재령군(載寧郡)의 명신중학교(明新中學校)에서 지리와 역사를 가르쳤다. 1919년 2월 상순 최린(崔麟)은 최남선(崔南善)·송진우(宋鎭禹)·현상윤(玄相允)과 회합하여 만세 운동을 계획하고 사회 각층의 주요 인물들을 포섭하고자 하였다. 이 가운데 최남선은 정주의 장로 이승훈(李昇薰)을 독립선언에 참여시키고자 하였다. 당시 최남선은 현상윤에게 연락을 부탁하였는데, 이때 현상윤의 부탁을 받고 이승훈에게 독립선언 계획에 대한 소식을 전하였다. 이를 통해 기독교 측도 3·1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3·1운동 이후 손병희를 비롯한 다른 민족대표들과 함께 붙잡혔으나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증거불충분으로 무죄 석방되었다. 1921년 휘문중학교 교사가 되었고 동시에 장교정(長橋町)에 있는 한규설의 집에서 가정교사로 일하였다. 광복 이후에는 경성여자상업학교, 문영여자중학교, 휘문중학교 등의 교장을 역임하였다. 조선지리학회회장을 맡기도 하였다. 1949년 공군사관학교 교수로도 재직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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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내란 경성지방법원을 본건의 관할재판소로 지정 고등법원 1920-03-22 국가기록원
2 판결문 보안법위반, 출판법위반, 소요 본건 공소를 수리하지 않음 경성지방법원 1920-08-09 국가기록원
3 판결문 보안법위반, 출판법위반, 소요 무죄 경성복심법원 1920-10-30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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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묘지 대전현충원 대전광역시 유성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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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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