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훈전자사료관

통합검색
독립유공자 명단보기
 

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7793
성명
한자 朴秀燦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등록된 사진이 없습니다.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1991 훈격 애국장
1919. 3. 6 경성고등보통학교(京城高等普通學校) 3학년에 재학하면서「동포여 일어나라」는 격문 800여 매를 등사하여 서울 관훈동(寬勳洞) 소격동(昭格洞) 부근에 살포하고 1919. 3. 7에는 학생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하여 활동하다 피체되어 징역 1년 6월(미결 180일 산입)을 받고 복역하다가 옥중사 순국한 사실이 확인됨.
원문보기 한자보이기
  • 피체(被逮) : 남에게 붙잡힘
  • 복역(服役) : 징역을 삶.
  • 격문(檄文) : 1. 어떤 일을 여러 사람에게 알리어 부추기는 글. 2. 급히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각처로 보내는 글. 3. 군병을 모집하거나, 적군을 달래거나 꾸짖기 위한 글.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2권(1986년 발간)

함경북도 길주(吉州) 사람으로, 1919년 3·1운동 때 「동포여 일어서라」는 격문을 발행하고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는 당시 경성고등보통학교 3년생으로 3월 6일 동급생인 박노영(朴老英) 및 경성공업전문학교 부속, 공업전수소 2년생인 김세룡(金世龍)과 독립 취지를 고양하는 격문을 발행하기로 결의하였다.

이에 격문의 원고는 경성의학전문학교 학생으로 3·1학생 만세시위의 주모자인 한위건(韓偉健)에게 부탁하여 작성하고, 박노영·방재룡(方在龍)과 함께 관훈동(寬勳洞) 김세룡의 집에서 유석우(庾錫祐)로부터 빌린 등사판으로 조선독립단(朝鮮獨立團) 명의로 된 격문 800여 매를 인쇄하였다.

그 내용은 민족대표 33인의 숭고한 뜻을 이어받아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독립을 쟁취하자는 것으로, 3월 8일 관훈동 일대에 250여 매를 배포하고, 소격동(昭格洞) 신용식(申傭植)의 집에서 방재룡이 주선한 사람에게 250여 매를 전해주어 배포케 하는 등, 독립정신을 고취시키는데 힘쓰다가 체포되었다.

그리하여 이 해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832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9권 178∼201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3권 95·105·141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106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권 130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권 66·77·123·124·125∼128·160∼162·173·184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박수찬 - 함북 길주(吉州) -
본문
1900년 4월 14일 함경북도 길주군(吉州郡) 웅평리(雄坪里) 용천동(龍川洞)에서 태어났다. 1919년 만세운동 당시 경성고등보통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었으며, 서울 안국동(安國洞) 최한석(崔漢錫)의 집에서 하숙하고 있었다. 1919년 3월 1일 서울의 만세시위에 참여하였고, 3월 8일에는 서울 시내에 격문을 돌렸다.1919년 2월 28일 경성부 정동(貞洞)의 예수교 예배당에서 조선독립선언서 200여 매를 받은 경성고등보통학교 김백평(金栢坪)이 적선동(積善洞) 박창수(朴昌洙)의 숙소에서 같은 학교 3학년생인 박노영(朴老英) 등과 만남을 가졌다. 그 자리에서 김백평은 조선독립선언서를 보여주고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한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이에 박노영·박쾌인(朴快仁)·김백평은 3월 1일 정오 무렵 경성고등보통학교 전체 학생을 대상으로 만세시위 소식을 전하면서 동참할 것을 권유하였다.이에 3월 1일 오후 2시 탑골공원에서 시작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박노영·박쾌인·김백평 등이 인솔하는 학생들과 함께 탑골공원으로 향하였다. 서울 인사동(仁寺洞)·낙원동樂(園洞)·관훈동(寬勳洞)을 지나가면서 사람들에게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만세시위 참여를 권유하였다. 이후 종로 거리로 진출하여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면서 행진하였다.3월 7일 박노영·김세룡(金世龍)과 함께 한위건(韓偉健)이 제작한 「동포여 일어서라!」라는 제목의 격문을 인쇄·배포하기로 결심하였다. 당일 경성부 간동(諫洞) 민부훈(閔孚勳)의 집에서 강선필로부터 인쇄·배포에 필요한 자금 10원을 받았다. 그 자금으로 백지와 등사잉크를 구입하였고, 유석우(庾錫祐)가 빌린 등사판을 이용해서 3월 7일 밤부터 3월 8일 새벽 1시까지 관훈동 김세룡의 방에서 방재룡(方在龍)·김한위(金漢偉)와 함께 약 800매를 인쇄하는 일을 맡았다.인쇄를 마친 후 250매를 챙겨서 3월 8일 경성부 견지동(堅志洞)과 인사동 방면에 배포하였다. 그리고 그날 아침 관훈동 부근 길에서 이름을 알지 못하는 한 사람에게 인쇄물 250매를 맡겨서 일반인에게 배포하도록 하였다. 한편 박노영은 경성부 소격동(昭格洞) 신용식(申傭植)의 방에서 인쇄물 약 250매를 방재룡의 주선으로 서울 일대에 배포하도록 하였으며, 김세룡은 가회동(嘉會洞) 조홍식(趙弘植)의 방에서 인쇄물 약 200매를 최사열(崔士烈)에게 교부하여 배포하도록 하였다.일본 군경에게 격문 「동포여 일어서라!」를 인쇄하고 배포하였다는 이유로 붙잡혀 가혹한 조사를 받은 후 재판에 회부되었다.1919년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으나 1920년 2월 2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경성복심법원 판결이 끝난 직후인 3월 8일 옥중에서 사망하였다.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도움말
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출판법위반, 보안법위반 경성지방법원의 공판에 부침 경성지방법원 1919-08-30 국가기록원
2 판결문 보안법위반, 출판법위반 징역 1년 6월, 미결구류일수 120일 본형에 산입 경성지방법원 1919-11-06 국가기록원
3 판결문 보안법위반등 징역 1년 6월(원판결중 피고에 관한부분 취소), 미결구류일수 중 180일 본형에 산입 경성복심법원 1920-02-27 국가기록원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대전현충원(위패) 대전광역시 유성구
국립묘지 안장자 위치정보 시스템 바로가기

관련 현충시설 정보

도움말
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감사의 글 Total 0
목록 개수

인쇄 목록
  •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십시오.
  • 이용자의 참여가 사이트 가치 향상에 큰 도움이 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 독립유공자 공적조서는 정부포상 결정당시의 ‘공적조서’를 공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으며,
  • 독립유공자 공훈록은 공적조서상 근거정보를 기본바탕으로 전문가의 원고집필을 통해 발간된 책을 온라인으로 제공하는 것입니다.
  • 따라서, ‘공적개요(공적조서)과 공적내용(공훈록)’은 원칙적으로 수정불가하며,
  • 다만, 온라인으로 제공되는 기본정보(성명, 생몰일자, 본적지)에 대한 사항은 ‘오류신고’를 통해 신청 가능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페이지 별 오류신고
화면(사료)위치 독립유공자 공적정보 > 박수찬(관리번호:7793) 오류 유형 *
오류 제목 *
오류 내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