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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7062
성명
한자 李仁植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1962 훈격 독립장
1. 19세의 소년(少年)으로 기미(己未) 3·1운동(運動)참가(參加) 미국영사관(美國領事館)과의 연락 책임(連絡責任)을 지는 한편 전북학생대표(全北學生代表)활약(活躍)하다가 체포(逮捕)되어 서대문감옥(西大門監獄)에서 10개월(個月) 복역(服役).
2. 1920. 8. 전재산(全財産)방매(放賣)하여 만주(滿洲)로 가서 임정 요인(臨政要人)들에게 팔천원(八千圓)수교(手交) 임시정부 건국공채(臨時政府建國公債) 팔매(八枚)를 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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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7권(1990년 발간)

전북 옥구(沃溝) 사람이다. 보성고보(普成高普)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3월 1일의 시위에 적극 참여하였고, 3월 5일 진행된 남대문(南大門) 시위에도 주도적으로 활동하는 한편 미국영사관(美國領事館)과의 연락 책임을 맡았으며, 전북(全北) 학생대표로 활약하다가 일경에 붙잡혀 서대문(西大門)형무소에서 10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후 곧 옥구로 내려가 전답과 가옥 등 전재산을 방매하여 만주로 망명하였고 상해로 가 임시정부에 8천원을 헌납하였으며, 임시정부에서 발행한 건국공채(建國公債) 8매를 받았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임정공채증서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106·107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220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9권 182·186·189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권 105·112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권 59·73·75·84-88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3권 94·102·104·107·141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3권 26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이인식 호 춘고(春皐) 전북 옥구 3.1운동 및 독립자금 모금
본문
1901년 10월 12일 전라북도 옥구군 임피면(臨陂面) 읍내리(邑內里)에서 출생했다. 부친은 이태하(李泰河)로 약 30만원의 재산을 소유한 자산가였다. 3·1운동 당시 보성고등보통학교 3학년 학생으로, 경성부 재동(齊洞) 38번지 김종원(金鍾元)의 방에서 중앙고등보통학교의 이병관(李炳寬), 후에 소설가가 된 동향(同鄕)의 채만식(蔡萬植)·강성진(姜成鎭)·김갑수(金甲洙)·휘문고등보통학교의 김성록(金成錄)·조남승(趙南勝)과 3 ~ 4명의 성명을 알 수 없는 학생과 동숙하고 있다. 2월 25, 26일경 독립운동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3월 1일 오후 1시 반경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안국동을 지날 때 보성전문학교의 최동명(崔東明)에게서 오후 2시에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식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일단 하숙으로 돌아갔다가 탑골공원으로 향하던 중 인사동에서 장채극(張彩極)을 만났다. 장채극에게서 『조선독립신문』 9매와 독립선언서를 받아 인사동의 미곡상 4곳에 배포했다. 군중에게 선언서 등을 배부하고 탑골공원으로 가서 독립선언식에 참석했다. 군중은 박수를 치고 또 만세를 부르면서 공원에서 나오고 있었다. 군중과 함께 시위대에 가담하여 종로로 나와서 남대문 근처까지 가면서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불렀다. 신문조서에 따르면 3월 5일 오전 남대문역에서 학생단 만세 시위가 있었을 때 ‘국장 때문에 고향에서 와 있던 친척을 전송하기 위하여 오전 8시 40분에 남대문역에 갔다고 한다. 검사 등의 신문을 받을 때는 친척 배웅을 위해 갔다고 했으나, 학생단 시위에 참여하기 위해 갔을 것이다. 시위대의 일원으로 군중과 함께 독립 만세를 부르며 시위행진을 했다. 그때 누군가가 군중 속에서 붉은 천을 살포하자, 붉은 천 하나를 주어 만세를 불렀다. 군중이 남대문 쪽을 향하여 만세를 부르면서 진행하자, 시위대의 일원으로 남대문 근처에까지 갔다. 경찰관이 나타나 군중을 제지하자, 경찰의 진압을 피하여 행진해 나아가는 군중과 함께 북미창정(北米倉町) 입구 근처까지 갔다. 시위대가 해산할 때 집으로 돌아왔다. 만세시위에 참여한 혐의로 체포되어 서대문(西大門)형무소에서 10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종로경찰서 유치장에 갇혀 있을 때 독립자금 모집의 비밀 사명을 띠고 활동하다 붙잡혀 처벌을 받게 된 이원형(李源亨)을 알게 되었다. 출옥 후 군자금을 마련하기로 결심하고 곧 옥구로 내려가 전답과 가옥 등 재산 중 일부를 팔거나 저당잡혀 마련한 9천 원을 가지고 서울로 가서 이원형을 만났다. 이원형은 신의주로 가서 올림픽 마크가 있는 엿장수를 찾으라고 했다. 일제 경찰의 눈을 피하기 위해 친척 한 사람을 대동하고 서울에서 개성까지는 기차를 타고, 개성에서는 걸어서 신의주로 갔다. 1920년 8월 신의주에 도착하여 3일 만에 해당 엿장수를 만나 그의 안내를 받아 만주 봉황성으로 가서 임시정부 요인에게 8천 원의 독립자금을 냈다. 임시정부 요인은 1천 원짜리 건국공채(建國公債)를 무기명으로 5매, 기명으로 3매를 주었다. 무기명 공채 5매는 자신의 허리띠를 갈라 감추고, 기명 공채 3매는 친척의 가죽신 밑창 안에 넣고 귀국하다가 경찰의 단속이 심해 가죽신 안에 든 것은 신과 함께 버리고 자신이 지닌 것만 가지고 돌아와 집 뒤 조부 산소 옆에 파묻어 숨겼다. 그후 일본·만주 등지를 전전하며 여러 사립학교를 세웠다. 해방 후 1953년 임피중학교를 인수하여 육영 사업을 했다. 한때 1만 석에 달하던 재산을 독립운동과 국내외 육영 사업에 집 한 칸 남김없이 다 쏟아 넣고 학교에서 제공한 초가집 사택에서 살았다. 정부에서는 공훈을 기리어 1962년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이정은)

수형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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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출판법위반, 보안법위반 경성지방법원의 공판에 부침 경성지방법원 1919-08-30 국가기록원
2 판결문 보안법위반, 출판법위반 징역 7월, 3년간 집행유예, 미결구류일수 90일 본형에 산입 경성지방법원 1919-11-06 국가기록원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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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서울현충원 서울특별시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안장자 찾기 바로가기

관련 현충시설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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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2 동상 애국지사 춘고 이인식선생 동상 전라북도 군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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