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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6681
성명
한자 朴老英
이명 朴耆壽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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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국내항일 포상년도 1992 훈격 애국장
1919.3.1 경성고등보통학교(京城高等普通學校) 3년생(年生)으로 강기덕(康基德) 김백평(金柏坪) 등과 함께 학생들을 규합하여 시내(市內)에서 시위가 전개되었을 때 참가케 하는 한편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 200여매를 배부하고 3월6일의 제2(次) 학생시위 시(學生示威時)에는 선전문(宣傳文)을 동사기를 이용하여 800여매를 인쇄하였으며 3.8~3.10일간에는 격문(檄文)을 인쇄 배부하는 등 활동하다가 피체(被逮)되어 징역2년을 받았으며 1931.3.2 소위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으로 피체(被逮)되어 징역2년을 받아 2회에 걸쳐 징역4년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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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피체(被逮) : 남에게 붙잡힘
  • 규합(糾合) : 어떤 일을 꾸미려고 세력이나 사람을 모음.
  • 격문(檄文) : 1. 어떤 일을 여러 사람에게 알리어 부추기는 글. 2. 급히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각처로 보내는 글. 3. 군병을 모집하거나, 적군을 달래거나 꾸짖기 위한 글.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0권(1993년 발간)

함북 부령(富寧) 사람이다.

1919년 3월 1일 당시 경성고등보통학교(京城高等普通學校) 학생으로 광무황제의 인산일을 계기로 강기덕(康基德)·박쾌인(朴快仁)·김백평(金栢坪) 등과 함께 같은 학교 학생들을 규합하는 한편 서울 시내에서 벌어진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여 독립선언서 200여매를 인사동(仁寺洞)·낙원동(樂園洞)·관훈동(寬勳洞) 일대의 군중에게 배포하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를 벌였다.

같은 해 3월 6일 학생들을 중심으로 전개된 서울에서의 제2차 만세운동에 참가하여 한위건(韓偉健)이 쓴 선언문 800여매를 등사하여 서울 시내에 배포하고 3월 8일에서 10일까지 '동포여 일어나라'는 격문을 인쇄하여 배포하는 등 독립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활동하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이해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공소하였으나, 다음 해인 1920년 2월 2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1931년 3월 2일에는 함북도민 항일결사를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일경에게 붙잡혀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대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중국 용정(龍井)으로 망명하여 대성중학교(大成中學校) 교사로 근무하다가 일경의 체포령이 내려지자 피신하여 은둔생활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신분장지문조회회보서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832·834면
  • 울산박씨세보 명현록 27세
  • 용정고교(대성, 동흥) 동창회 재직증명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106·107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9권 174·175·183·186·187·200·204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13집 94·98·101·104·105·107·110·111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2권 105·112·126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5집 58∼82·123∼128·155∼184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박노영 박기수(朴耆壽), 박철(朴鐵) 함북 부령(富寧) 3.1운동, 함북청년총연맹 사건, 함북공산당 사건
본문
1900년 8월 27일 함경북도 부령군(富寧군) 부거면(富居面) 사구동(沙口洞)에서 태어났다. 부령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16년에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1919년 경성고등보통학교 3학년 학생의 신분으로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그해 2월 중순 학생 시위의 주도자인 보성전문학교 강기덕(康基德)과 만나 독립운동에 대해 논의하였다. 이어 같은 학교 4학년인 김백평(金栢坪)과 3학년 박쾌인(朴快仁)을 만나 경성고등보통학교 대표이자 연락 책임자가 되었다. 2월 28일 김백평에게 독립선언서 200매를 받고 거사 당일의 계획을 들은 후, 3월 1일 정오 휴식시간에 김백평·박쾌인과 함께 각 교실에 학생을 모아놓고 탑골 공원에서 독립을 선언한다는 사실을 알렸다. 때마침 국장 참여 예비연습을 위해 전교생이 교정에 모여 있었는데, 이들을 결속해 선두에서 이끌며 탑골 공원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시위 도중 서울의 인사동(仁寺洞), 관훈동(寬勳洞), 낙원동(樂園洞) 일대 민가와 통행하는 사람들에게 독립선언서 200여 매를 배부하였다. 탑골 공원에서 만세시위를 벌인 다음 종로(鐘路)를 비롯한 서울 곳곳에서 시민들과 함께 만세시위를 벌였다.3월 5일에는 학생들을 중심으로 전개된 남대문 만세운동에도 참여하였다. 3월 7일 한위건(韓偉健)이 쓴 「동포여, 일어나라!」는 격문을 같은 학교 2학년 박수찬(朴秀燦), 같은 하숙생이자 경성공업전습소 2학년인 김세룡(金世龍)과 함께 다음날까지 800매를 인쇄해 3월 10일까지 서울의 북촌(北村) 일대에 배포하는 등 만세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다가 일제 경찰에게 붙잡혔다.이 일로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으나, 1920년 2월 2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그러다가 감형되어 1920년 10월 풀려났다.출옥 후인 1921년부터 1928년 9월까지 함북 경성(境城)·회령(會寧)과 서울에서 각종 교육·사회운동 단체에서 활동하였다. 부령군 연천면(連川面) 연천학계(連川學契)에 참여하였고, 사립학교 교사, 동아일보 청진지국(淸津支局) 기자, 서울청년회 집행위원, 함북대중운동자동맹(咸北大衆運動者同盟) 집행위원, 성진청년연맹(城津靑年聯盟) 임원, 경성전위동맹(鏡城前衛同盟) 임원, 함북청년총연맹(咸北靑年總聯盟) 집행위원(상무위원), 함북기자단 집행위원, 대중교육자동맹(大衆敎育者同盟) 부의장, 신간회 경성지회(新幹會鏡城支會) 창립준비위원, 경성청년동맹(鏡城靑年同盟) 조직연락부장 등 수많은 사회·사상단체에서 지도적 위치에 있었다.이러한 사회활동 과정에서 두 차례의 예심 면소와 한 차례의 형을 받아 모두 세 차례 투옥되었다. 1924년 8월 나남공명청년회(羅南共鳴靑年會)에서 공산주의 색채의 선언 강령을 인쇄 배포했다는 이유로 나남경찰서에 붙잡혔고, 그해 12월에 청진지방법원 예심에서 면소되어 풀려났다.1928년 9월 중순 공산주의 사회 실현을 위한 단체 조직 혐의로 함경북도 청년총동맹조직 동지 32명과 함께 함경북도경찰부에 체포되었으나, 청진지방법원 예심에서 면소되어, 1930년 3월 3일 청진형무소에서 출옥하였다. 한편 19개월 동안이나 이어진 예심에 항의하기 위해, 옥중에서 동지들과 단식투쟁을 벌이기도 하였다.그러나 같은 해 5월 다시 비밀결사 연통제(聯通制)의 일원으로 함북청년동맹이나 신간회에서 함께 참여하던 엠엘파공산당 이재하(李載厦)의 권유로 조선공산당에 가입해 경성야체이카에 소속되었다는 혐의로 일제 경찰에게 다시 붙잡혔다. 같은 해 12월 26일 청진지방법원, 그리고 이듬해 3월 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았다. 대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1932년 12월 26일 풀려났다.그후 중국 룽징(龍井)으로 망명하여 대성중학교(大成中學校) 교사로 근무하다가 일제 경찰의 체포령이 내려지자 피신하여 은둔 생활을 하였다.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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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출판법위반, 보안법위반 경성지방법원의 공판에 부침 경성지방법원 1919-08-30 국가기록원
2 판결문 보안법위반, 출판법위반 징역 2년, 미결구류일수 120일 본형에 산입 경성지방법원 1919-11-06 국가기록원
3 판결문 보안법위반등 공소 기각, 미결구류일수중 60일 본형에 산입 경성복심법원 1920-02-27 국가기록원
4 판결문 치안유지법위반 징역 2년 경성복심법원 1931-03-02 국가기록원
5 인물카드 보안법위반, 출판법위반 2년 경성복심법원 1920-02-27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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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당 유공자는 묘소 위치 확인이 필요한 독립유공자 입니다.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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