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3.1 서울에서 거사 (擧事) 된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하여 독립만세를 고창 (高唱) 하고 동년 3월5일 제2차 (次) 학생 시위 (學生示威) 에 있어서는 남대문 역전 (南大門驛前) 에 모인 수만명의 시위대열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 연창 (高唱連唱) 하다가 피체 (被逮) 되어 징역 6월(미결 (未決) 90일 통산 (日通算) )에 3년간 (年間) 집행유예 (執行猶豫) 를 받았으며 1932년부터 상해 (上海) 대한민국임시정부 (大韓民國臨時政府) 와 연통 (聯通) 하면서 김구 (金九) 모친 (母親) 의 안악 탈출 (安岳脫出) 지원 (支援) 과 안악군 내 (安岳郡內) 청소년의 민족의식 고취 를 위한 학교설립등 3년간 (年間) 에 걸친 활동 (活動) 사실이 확인됨.
원문보기
한자보이기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0권(1993년 발간)
황해도 안악(安岳) 사람이다.
1919년 당시 경성의학전문학교 4년생으로 3월 1일 서울 탑동(塔洞) 공원에서 일어난 독립선언식에 참가한 후 시위군중과 함께 시내로 진출하여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같은 해 3월 5일 제2차 학생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자 남대문역전 광장에 모인 수만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깃발을 앞세우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남대문(南大門)·조선은행(朝鮮銀行)에 이르러 다른 시위대와 합세하여 시위하다가 일경의 무력으로 강제 해산당하고 붙잡혔다.
같은 해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형에 3년간 집행유예를 받았다.
출소 후 1920년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병원에 근무하면서, 1932년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연락을 취하여 스승인 김 구 모자(母子)의 안악(安岳) 탈출을 지원하였다.
1935년 여름 안악군내 청소년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하여 김홍량(金鴻亮)·김용정(金庸鼎)·김용진(金庸震) 등과 함께 안악중학교(安岳中學校)를 세우기 위해서 기성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13집 94∼142면
- 매일신보(1919. 11. 8)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5집 58∼82·88∼95면
- 동아일보(1936. 2. 13)
- 안악군지(안악군민회, 1976. 5. 20) 241면
- 양산대(최태영·김구량 공저, 1990. 6. 15) 149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2권 111∼11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