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0권(1993년 발간)
황해도 연백(延白) 사람이다.
1919년 3월 1일 당시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京城女子高等普通學校)에 재학중 서울 탑동공원에서 일어났던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참가한 후 고향인 배천(白川)으로 돌아와 서울에서 숨겨 가져온 '동포(同胞)여 일어서자'는 격문 등을 송흥국(洪興國)·이정식(李廷植)·오예제(吳禮濟)·조기복(趙起福)에게 전달하고 이들과 함께 태극기와 격문 등을 제작하는 등 시위준비를 하였다.
3월 30일 배천읍 장터에 모인 1,000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행진을 전개하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같은 해 5월 24일 해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5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0년 9월부터 황해도 안주(安州) 유신여학교(維新女學校)에서 교사로 활동하였다.
1924년 10월에는 조선일보(朝鮮日報) 본사에 학예부 기자로 입사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여기자로서 정치부 사회부에서 활동하였으며, 1930년 7월에는 학예부장으로 임명되어 2년간 활동하다 은퇴하였다.
1927년 5월 27일 근우회(槿友會) 창립총회에 참석하여 초대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그후 근우회가 폐회될 때까지 계속해서 활동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신분장지문조회회보서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국사편찬위원회) 제8권 474면
- 여성전진칠십년사(최은희, 1980. 8. 25) 573면
- 경력증명서(조선일보사, 1990. 3. 29)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2권 241∼243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10권 939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14집 411∼414면
- 동아일보(1927. 5.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