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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6216
성명
한자 吳興順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1992 훈격 대통령표창
1919. 3. 1 서울 파고다공원(公園)에서 국민회보(國民會報)등사(謄寫) 배포(配布)하여 독립선언(獨立宣言)취지(趣旨)를 알린후 대한독립만세(大韓獨立萬歲)고창(高唱)하며 시가(市街)행진 시위(行進示威)하였고,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를 「러시아」영사관(領事館)전달(傳達) (後) 피체(被逮)되어 징역8월(미결(未決) 180일 산입(算入))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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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0권(1993년 발간)

충남 홍성(洪城) 사람이다.

1919년 3월 1일 배재고등보통학교(培材高等普通學校) 학생으로 국민회보(國民會報) 수천매를 인수받아 서울 탑동(塔洞)공원 동쪽에서 그곳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배부하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에 참가하였으며 민족대표의 한사람인 이필주(李弼柱)의 지시에 따라 독립선언서를 러시아영사관에 전달한 후 일경에 붙잡혔다.

같은 해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형을 선고받고 공소를 제기하여, 1920년 2월 2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부분 취소되었으나 징역 8월의 옥고를 치렀다.

1920년 10월 28일 서대문 형무소에서 출옥 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東京)에 있는 입교대학(立敎大學)에 입학하고, 일본에 있는 유학생들을 규합하여 김시현(金始顯) 등과 함께 학생운동을 주도하며 활동하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판결문(1920. 2. 27 경성복심법원)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2권 106·107·111·124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5집 104∼110·155∼184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오흥순 - 충남 홍성(洪城) 서울 만세시위
본문
1901년 7월 12일 충청남도 홍성군(洪城郡) 광천면(廣川面) 옹암리(瓮岩里)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고향에서 한학을 공부하다가 1918년 서울의 배재학당(培材學堂)에 진학하여 수학하던 중,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에 참여하여 일제로부터 고초를 겪었다.1919년 만세운동이 시작되기 전날인 2월 28일 밤, 한문(漢文)교사 김진호(金鎭浩)의 연락을 받고, 만세운동에 참여할 것을 결의한 김동혁(金東赫) 등 배재학당 학생들 몇몇과 함께 정동(貞洞)에 위치한 김진호의 자택에서 모였다. 그 자리에서 김진호로부터 밀봉된 봉투를 러시아영사관(露國領事館)에 전달하라는 임무를 받아 3월 1일 오후 2시경 이를 실행하였다. 밀봉된 봉투 안에는 “한국은 독립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내용의 독립선언서가 들어 있었다.이후 러시아영사관에 해당 독립선언서를 무사히 전달한 후, 즉시 종로(鐘路)로 가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서울 시내를 행진하고 있던 시위대와 우미관(優美館) 앞에서 합류하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어 3월 3일 밤 배재학당의 기숙사 뒤편에서 이름을 알 수 없는 같은 학교의 학생으로부터 “한국 병합에 반대하여 조선은 독립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내용의 「국민회보(國民會報)」 20여 매를 전달받았다. 그 즉시 종로로 가서 탑골공원 동쪽에서 그곳을 지나는 사람들 6~7명에게 「국민회보」를 배포하며 만세운동에 참여할 것을 호소하였다. 배포 후 남은 「국민회보」는 익선동(益善洞)에 거주하는 같은 학교 학생 오영근(吳榮根)에게 전달하였다. 3월 5일에는 낙원동(樂園洞)에서 허신(許信)으로부터 『조선독립신문』 5매를 수령하여 오영근에게 전달하는 등 서울에서 지속적으로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이로 인해 일제 경찰에 붙잡혀 재판에 회부되었고 1919년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8월을 받았고, 판결에 불복하여 항소하였다. 1920년 2월 2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의 일부가 취소되었음에도 동일한 징역 8월을 받았다. 이에 상고를 포기하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겪었다. 1919년 만세운동 이후 식민지 한국의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일제가 1920년 4월 28일 시행한 ‘은사령(恩赦令)에’ 따라 조기 출옥하였다.출옥 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東京)의 릿쿄대학(立敎大學)에 입학하여 학업을 계속하였다. 유학 생활 중에도 김시현(金始顯) 등과 함께 일본 유학생들의 학생 운동을 주도하면서 지속적으로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도움말
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출판법위반, 보안법위반 경성지방법원의 공판에 부침 경성지방법원 1919-08-30 국가기록원
2 판결문 출판법위반, 보안법위반 징역 8월, 미결구류일수 120일 본형에 산입 경성지방법원 1919-11-06 국가기록원
3 판결문 보안법위반등 징역 8월(원판결중 피고에 관한부분 취소), 미결구류일수 중 180일 본형에 산입 경성복심법원 1920-02-27 국가기록원
4 인물카드 보안법위반, 출판법위반 징역8월 경성복심법원 1920-02-27 국사편찬위원회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소재지
국내산재 경기도 연천군

관련 현충시설 정보

도움말
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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