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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 8월 9일 경상남도 양산군(梁山郡) 좌이면(左耳面) 유두리(柳頭里, 현 부산광역시 사상구 삼락동)에서 김욱권(金昱權)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김녕(金寧)이고 호는 동산(東山)을 썼다. 사육신 김문기金文起의 후손으로 양반 지주 집안에서 자랐다. 부친이 광산업에 관여했다가 재산을 탕진하고 가세가 기울어 집안이 몰락하였다. 고향을 떠나 양산군(梁山郡, 현 양산시) 상북면(上北面) 외석리(外石里)로 이사하였다. 1911년 지주 지씨(池氏)의 딸과 혼인하였고, 처가의 도움으로 사립 명진학교(明進學校)를 다녔다. 졸업 후 동래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16년 경성의학전문학교(경성의전)에 입학하였다. 1919년 만세운동 당시 경성의학전문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이었다.1919년 1월 하순경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박희도(朴熙道)와 이갑성(李甲成)은 서울에서 학생을 모으고 실행 방법을 구상하였다. 박희도는 1919년 1월 하순 각 전문학교의 대표 학생들을 관수동 중국 요리점 대관원(大觀園)으로 초청하였다. 여기에 경성의전 대표로 한위건(韓偉鍵)과 함께 참석하였다. 이곳에서 박희도로부터 독립을 위한 집회 논의와 결속의 필요성에 대해 듣고 독립운동의 방안에 대해 협의하였다. 2월 12일과 14일에는 음악회 명목으로 이갑성의 초청을 받아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 내에 있는 그의 집에 가서 해외에서의 독립운동 정세와 독립사상을 고취하기 위한 논의를 이어나갔다.1919년 2월 20일 서울 인사동(仁寺洞)의 승동(勝洞)예배당에서 제1회 학생 간부회를 개최하였다. 여기서 각 학교 대표들과 모여 회의를 한 뒤 각자 자신의 학교를 대표하여 책임을 지기로 하였다. 각 학교당 대표자를 1명씩만 정해서 체포에 대비하기로 하였는데, 이때 경성의전 대표가 되었다. 2월 23일 박희도가 각 학교 대표들에게 민족대표와 더불어 서울에서 만세운동의 전면에 서 줄 것을 요청하자, 이를 승낙하였다. 2월 25일 서울 정동(貞洞)예배당에 모여서 각 학교의 학생 규합과 천도교, 기독교의 독립운동에 참가하여 활동하는 것 등을 협의하였다. 2월 26일 각 학교의 대표들과 모여 학생들에게 권유한 결과가 좋다고 보고하였다다. 2월 28일 밤 강기덕(康基德)에게 전달된 민족대표 33인 명의의 「독립선언서」를 각 전문학교의 대표들과 함께 이필주(李弼柱) 집에 모여서 배부받았다. 이 자리에서 독립운동에 학생을 규합하여 참가할 것과 체포를 당하지 않은 경우에는 계속해서 독립운동을 해나갈 것을 결의하였다. 다음날인 3월 1일 오후 2시 파고다 공원에서 독립선언이 있을 것이니 많은 학생이 참가하도록 하고, 「독립선언서」는 2시에 일제히 배포하겠다고 하였다.1919년 3월 1일 오후 2시경 동지들과 함께 파고다 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그곳에 모여 있던 수 천 명의 군중에게 시위 참여를 독려하였다. 이어서 어대선(魚大善)·이형영(李亨永)과 함께 종로 네거리로 가서 군중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하던 중 붙잡혔다.1919년 8월 3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예심이 종결되었고, 그 해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지만, 1920년 2월 2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치렀고, 1920년 8월 30일 풀려났다.풀려난 이듬해인 1921년 경성의전을 졸업하고 의사 면허를 취득한 뒤 울산과 기장에서 공의(公醫)로 활동하였다. 1926년에는 경남 부산부 영주도(瀛州洞)에서 동산의원(東山醫院)을 개원하였고, 1942년 현 남일초등학교 정문 앞으로 이전해 해방 이후까지 병원을 운영하였다. 동산의원에는 최천택(崔天澤)·박희창 등 부산과 경남지역 독립운동가들이 자주 출입하였으며, 병원 수입으로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하였다. 1938년 『동아일보』 부산지국의 고문이 되었고, 1942년 부산제2중학 신설 실행위원 등으로 활동하였다.해방 이후에는 『대중신문』을 창간하고, 신탁통치배격위원회 재무부 상무위원, 민주주의민족전선 경남위원회 위원장과 중앙위원, 조선민족혁명당 경상남도위원장을 역임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6·25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8월 20일 김두봉(金枓奉)과 외사촌지간이라는 이유로 정보기관에 끌려갔다. 이후 사망한 것은 확인되었으나, 시신은 수습하지 못하였다.현재 경남 양산시 하북면 답곡리 성천마을에 가묘가 만들어져 있다. 1998년 4월 6일에는 대한광복회, 낙동문화원, 김녕 김씨 유두 문중에서 재실인 유헌재(柳軒齋) 정원에 ‘애국지사 동산 김형기 선생비’를 세웠다. 2019년 10월 부산광역시 사상구 모라동 김녕김씨종친회관 내에 ‘동산 김형기 선생 기념전시관’이 조성되었다.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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