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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5341
성명
한자 金百源
이명 金白源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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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1990 훈격 애족장
1919.3.1 서울에서 독립만세 시위(獨立萬歲示威)참가(參加)하고 조선 독립(朝鮮獨立)정당성(正當性)주장(主張)하는 격문(檄文)작성(作成)하여 조선총독(朝鮮總督)에게 보내어 우리나라의 독립(獨立)촉구(促求)하고 보신각(普信閣)앞에 운집(雲集)군중(群衆)에게 격문(檄文)낭독(朗讀)하는등 당시(當時) 최고령(最高齡)인 61세의 연장자(年長者)주동자(主動者) 역할(役割)을 하다 피체(被逮)되어 징역 8월을 받았으나 미결기간(未決期間)합산(合算)하여 11월 24일간의 옥고(獄苦)를 치른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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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9권(1991년 발간)

서울 사람이다.

그는 1919년 당시 서울 안국동(安國洞)에서 기독교 목사로 있으면서 3월 1일의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고 그후에도 계속 만세운동을 계획하여 왔다.

그러던 중 3월 12일 서린동 영흥관(瑞麟洞 永興館)에서 문일평(文一平)·백관형(白觀亨) 등과 같이 주동이 되어 조선13개도대표자회의(朝鮮13個道代表者會議)를 구성한 후 그 일원으로서 조국독립의 정당성과 일제침략을 규탄하는 격문을 작성하여 일부를 조선총독에 보내어 우리나라의 독립을 촉구하고 이날 하오에는 수백명의 군중이 모인 종로 보신각(鐘路 普信閣) 앞에서 격문을 낭독하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그리하여 이해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8월형을 선고받아 공소를 제기하였으나 다음해 2월 27일 경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1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判決文(1920. 2. 27 京城覆審法院)
  • 明治百年史叢書(金正明) 第1卷 831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2卷 122·123面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5輯 58∼82·128∼131·155∼184面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13輯 96·108面
  • 豫審終結決定書(1919. 8. 30 京城地方法院)
  • 韓國獨立運動史(文一民) 107·481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4卷 82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9卷 197·199面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백원 金白源 서울 종로(鍾路) -
본문
1859년 6월 29일 서울 종로구 낙원동(樂園洞)에서 태어났다.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는 출생연도가 1860년으로 되어 있다. 태어난 지역에 대해서 다른 기록도 보인다. 판결문에는 출생지가 평양부 외상리(外上里)라고 기재되어 있다. 평양부 외상리는 평안남도 평양부 대동군(大同郡) 용산면(龍山面) 외상리이다. 1919년 당시 60세의 나이로 서울 안국동(安國洞)에서 기독교 장로파 목사로 재직하던 중 3월 1일 독립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이전에 신문을 통해 파리강화회의에서 민족자결주의가 제기되었다는 것을 인지하였다. 그러던 3월 8일 오후 6시경 문일평(文一平)이 독립운동에 관해 상의하기 위해 교회로 찾아오면서 격문 발표 준비가 시작되었다. 이 자리에서 문일평이 손병희(孫秉熙) 등이 체포되었지만 조선의 독립은 조선인들이 모두 바라는 것이므로, 역할을 해보는 것이 좋지 않겠냐고 말하며, 조선총독에게 청원서를 제출하여 조선의 독립을 일본 정부가 승낙하게 하고, 손병희를 석방하게 하자고 제안하자, 이에 동의하면서 동지들을 더 모을 것을 제안하였다. 이 자리에서 문일평에게 청원서의 문안을 부탁하였다. 문일평과 의논을 마치고 3월 9일 광화문 근처에서 우연히 문성호(文成鎬)를 만나 조선독립운동에 관해 논의하고 행동을 함께 하기로 하였다. 3월 10일 경에는 차상진의 집을 방문하여 조선총독부에 독립을 청원하려고 계획하고 있음을 알렸다. 또한 차상진의 권유를 받은 조형균의 방문을 받고, 독립운동에 관해 논의하였다. 3월 11일 문일평으로부터 우편을 통해 「애원서(哀願書)」라고 제목을 지은 격문 2통을 받아 이를 문성호에게 전해주었다. 3월 12일 문일평, 차상진, 문성호, 조형균, 김극선, 백관형(白觀亨) 등과 함께 서린동(瑞麟洞)에 있는 중국 음식점 영흥관(永興館)에서 만났다. 이 때 2통의 격문 중 1통은 차상진과 문성호에게 주어 조선총독부로 가서 조선총독에게 전달하도록 했으며, 나머지 1통은 문일평, 김극선, 조형균, 백관형과 함께 종로 보신각으로 가지고 가서 낭독하기로 하였다. 격문은 조선13개도대표자회의(朝鮮十三個道代表者會議) 명의로 발표하였다. 애원서의 취지는 “3월 1일 손병희 등 33명이 독립선언을 한 것은 그들 독단으로 나온 것이 아니고 민족자결을 보증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들 후계자는 2,000만 동포를 대표하여 그 요구를 관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조선인이 독립을 바라는 것은 세계의 대세이며 또 문명의 정도라는 의미를 말하고 암묵적으로 조선독립을 정당하다 하고 그 목적을 관철하기까지 운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내용이었다. 종로 보신각에서 문일평이 대표로 낭독을 할 때 그 자리에 함께 있었다. 격문이 낭독되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러나 “독립을 선언한 것은 정당하다. 그 목적을 관철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대목을 읽던 도중 일본 경찰들이 와서 문일평을 붙잡았다. 이때 함께 붙잡혔다. 이후 유치되어 고초를 겪다가 1919년 8월 3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재판이 시작되었다. 이에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8월(미결구류일수 120일 본형 산입)을 선고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1920년 2월 2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1920년 4월 28일 사면되어 출옥하였다. 출옥 후 1921년 10월 23일 조선기독교광문사의 준비위원으로서 함흥의 신암리교회와 중하리교회에서 신자용력(信者用力)이라는 제목의 강연을 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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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출판법위반, 보안법위반 경성지방법원의 공판에 부침 경성지방법원 1919-08-30 국가기록원
2 판결문 보안법위반, 출판법위반 징역 8월, 미결구류일수 120일 본형에 산입 경성지방법원 1919-11-06 국가기록원
3 판결문 보안법위반등 공소 기각, 미결구류일수중 60일 본형에 산입 경성복심법원형사부 1920-02-27 국가기록원
4 인물카드 보안법위반, 출판법위반 8월 경성복심법원 1920-02-27 국사편찬위원회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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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서울현충원 서울특별시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안장자 찾기 바로가기

관련 현충시설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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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장소 보신각 3·1독립운동 기념터 서울특별시 종로구
2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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