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
1942년
1945년
194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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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5권(1988년 발간)
인천(仁川) 사람이다.
1923년 부친을 따라 중국 상해로 건너가 인성소학교(仁成小學校)와 공시중학교(公時中學校)를 졸업하였다. 그리고 중국군관학교 낙양분교에 입학하여 훈련을 받았다. 1936년 7월 중국 육군 제25사단 견습사관으로 근무하다가 1937년에 임시정부의 지령을 받고 남경에 가서 임시정부에 합류하였다.
1939년 10월 임시정부가 유주(柳州)에 있을 때 나월환(羅月煥)·이하유(李何有)·박기성(朴基成)·이재현(李在賢) 등과 함께 '한국청년전지공작대(韓國靑年戰地工作隊)'를 조직하여 부대장(副隊長)이 되었다. 이 한국청년전지공작대는 서안(西安)을 본거지로 하여 서북방면으로 전지공작을 전개하여 적의 기밀을 탐지하고 동포청년을 초모하는 등 백여 명으로 구성된 전투부대이었다.
1941년 1월 1일 한국청년전지공작대원들이 중심이 되어 광복군 제5지대를 조직하였다. 그는 제5지대의 부지대장 겸 제1구대장이 되어 서안(西安)을 중심으로 장병을 훈련시키는 동시에 초모·선전·정보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1942년 3월 부대원간의 불화로 대장 나월환의 암살사건이 있어 이에 연루되어 무기(無期)의 형을 받고 입옥되었다가 사면되었다. 광복군의 개편에 의하여 제5지대가 없어지자 그는 제2지대에 편입되어 중국의 중앙군 전시간부훈련단 안에 한국청년반을 특설하고 박기성·유해준·송호성 등과 함께 일선활동에 필요한 군사훈련과 외국어 등을 교육하였다.
1945년 4월 광복군 총사령부에서 경위대(警衛隊, 一名 土橋隊)를 중경에 설치함에 그는 제3대 대장을 역임하였다. 토교대의 주요 임무는 광복군 총사령부 경비 및 고위 요원의 호위·광복군의 간부요원 교육과 양성 그리고 일본군내의 한국인 사병에 대한 초모작전 등이었다.
광복 후 1946년에는 임시정부 주화대표단 동북특파원(駐華代表團 東北特派員)으로 교포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며 중국 당국과 교섭하여 교포 귀국의 편의를 도모하고 1948년 6월에 귀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4권 945면
- 사상정세시찰보고집(기2) 244·446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26면
- 무장독립운동비사 206면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13권 84면
- 임시정부의정원문서(국회도서관) 776면
- 조선통치사료(한국사료연구소) 487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357·379면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12권 332면
- 한국독립운동사(국사편찬위원회) 5권 74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6권 126·208·210·229·230·388·46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