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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0년 5월 2일 전라남도 광주군(光州郡) 광주면(光州面) 수기옥정(須奇屋町, 현 광주광역시 동구 수기동 일대)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탐진(耽津)이고, 초명은 최영종(崔泳琮)이다. 서당에서 한문을 익혔다. 1895~1900년 사이 강명환(姜明煥)과 결혼하였다. 장로교 기독교인으로 1904년 기독교를 수용한 후, 1907년 세례를 받고 흥종(興琮)으로 개명하였다. 1914년에는 장로교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고, 1915년 전도사가 되었다.
1905년 광주군 경무청 순검으로 재직하며 의병들을 후원하였고, 1907년 사직하였다. 이후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였고, 1907년 7월부터 광주농공은행에서 근무하다가 사직하였다. 1908년 3월에는 광주선교진료소 조수로 취직하였다.
1919년 3월 2일 평양(平壤)의 신학교로 가는 도중 국장을 참관하고 독립사상을 고취할 연설을 하기 위해 상경하였다. 3월 5일 남대문역에서 신조선신문(新朝鮮新聞)을 배부하고 민족자결주의에 대한 연설을 하였으며, 대한문에 이르러 「조선독립」이라 쓴 기(旗)를 흔들며 만세를 부르다가 붙잡혔다.
이 일로 1919년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며 항소하였으나, 1920년 2월 2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최종 기각되고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겪었다.
1920년 6월 풀려난 후 조선노동공제회 광주지회장을 맡았다. 1921년 6월 노동공제회 광주지회 개선임원 선정위원으로 위촉되었으며, 9월에는 광주청년회의 의사원으로 선임되었다. 1921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광주 북문밖교회 목사로 부임하였다. 같은 해 3월에는 시베리아로 선교를 떠나 1922년 6월 귀국하였다. 1923년 9월 광주소작인회연합회 대표로서 소작권 관련 교섭을 맡아 농민운동에도 참여하였다. 1924년 광주YMCA 회장에 취임하고, 광주수해구제회·광주협회 등 여러 단체에서 활동하였다. 1927년부터 1928년까지 신간회 광주지회장을 역임하였다. 또한 1927년 재만동포옹호동맹, 1928년 광주교육보급회 등을 통해 교육과 사회문제 해결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1929년에는 제주도 모슬포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여 1931년 7월 사직하였다. 1931년 9월 조선나병환자구제회를 설립하고 나환자구호활동을 벌였다. 1933년 4월 조선총독부를 방문하여 경무국장과 위생국장을 면담하고, 나병환자 구제를 위해 진정하였다. 1936년 2월에는 목포(木浦)에서 안창호와 동행하여 순천(順天)의 나환자치료소를 방문하였다. 1937년에는 지인들에게 사망통지서를 발송하고 무등산에 칩거하며 구호활동에 전념하였다. 1945년 9월에는 한국나예방협회를 조직하였다.
광복 후 전남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었고, 9월에는 고려청년당 창립준비회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1945년 제1회 도지사고문회 회장에 선임되었으며, 1946년 2월 서울에서 개최된 비상국민회의에 전남대표로 참석하였다.
1948년 3월 광주국민고등학교(삼애학교)를 설립하였다. 같은 해 호남신문사 초대회장에 취임하였으나 곧 사임하였다. 1950년 5월 대한민국당 전남도당부 발대식에서 광주시당부위원으로 명단에 올랐다. 1950년 대에는 음성나환자 정착촌인 호혜원(互惠院)·결핵환자 요양소인 송동원(松東院)·결핵환자를 위한 백십자여명회(白十字黎明會) 등을 설립하고 활동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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