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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4585
성명
한자 金栢枰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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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1990 훈격 애족장
1919.3.1∼3.5 서울시민(市民)독립만세 시위(獨立萬歲示威)합세(合勢)하여 태극기(太極旗)를 휘두르고 독립만세(獨立萬歲)고창(高唱)하며 시내(市內)행진 시위(行進示威)하다 피체(被逮)되어 징역 10월을 받았으나 미결기간(未決期間)합산(合算)하여 1년 2월의 옥고(獄苦)를 치른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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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9권(1991년 발간)

전남 여수(麗水) 사람이다.

1919년 당시 경성고등보통학교(京城高等普通學校) 학생으로 3학년에 재학중이었다. 손병희(孫秉熙)·강기덕(康基德)의 지휘아래 각 학교에 독립선언서가 교부되면서 그는 경성고등보통학교 대표자의 자격으로 선언서 2백매를 받아가지고 비밀리에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3월 1일 하오 2시 탑동(塔洞) 공원에서 대한독립을 선언한다는 것을 알렸다.

이렇게 1919년 3월 1∼5일 동안 서울시민의 시위에 합세하여 태극기를 휘두르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서울거리에서 만세시위를 벌이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그는 이해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형을 선고받아 공소를 제기하였으나 1920년 2월 2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1년 2개월간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韓國獨立運動史(文一民) 106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2卷 105面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5輯 58∼82·155∼184面
  • 判決文(1919. 11. 6 京城地方法院)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13輯 94·98·104·141面
  • 明治百年史叢書(金正明) 第1卷 832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9卷 174·181·187·199面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백평 - 전라남도 여수(麗水) 3.1운동
본문
1900년 8월 20일 전남 여수군(麗水郡) 여수면(麗水面) 서정(西町, 현 여수시 중앙동 일대) 상정(上井)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여수 지역의 이름난 만석꾼이자 1907년 여수 군수서리, 1932~1935년 중추원참의(中樞院參議) 등을 지낸 김한승(金漢昇)이다. 김한승의 4남으로 3·1운동 당시 경성고등보통학교(京城高等普通學校) 4학년에 재학하고 있었으며, 서울 송현동(松峴洞) 신옥우(申玉雨) 집에서 하숙하였다. 중앙감리교회에 다니며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김창준(金昌俊) 목사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1919년 2월 28일 밤 보성법률상업학교(普成法律商業學校) 강기덕(康基德)으로부터 독립선언서 200매 정도를 전달받고, 다음 날 오후 2시 파고다공원에서 독립 선언이 있을 예정이니 그때 선언서를 배포하도록 요청받았다. 3월 1일 오전 중에 학과를 마치고 하교하는 학생들에게 오후 2시까지 파고다공원으로 모이도록 권유하였다. 이후 인사동과 낙원동 일대의 각 민가와 행인들에게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파고다공원에 도착하였다. 독립선언서 낭독이 끝나자 군중과 함께 독립 만세를 외쳤다. 시위행진은 종로를 거쳐 남대문, 의주통(義州通, 현 의주로), 미국 영사관 앞에 이르렀다. 이후 대한문 앞과 종로를 거쳐 광화문과 서소문 일대를 거쳐 본정(本町, 현 충무로)에서 해산하였다. 3월 5일까지 만세 운동을 지속하다가 귀가하던 중에 명치정(明治町, 현 명동) 부근에서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이른바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을 명목으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5월 21일 심문조사 과정에서 독립운동을 하게 된 이유와 장래에도 지속할 것인지를 묻자, “한국은 4천여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데 일본과 병합된 것은 유감이며, 독립할 좋은 시기가 당도하면 그때도 독립운동을 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0개월 형이 선고되었다. 이에 항소하였으나 1920년 2월 27일 경성복심법원 형사부에서 기각당하였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겪고 1920년 4월 28일에 석방되었다. 출옥 이후 고향인 여수로 내려가 민중계몽과 대중사업에 힘썼다. 1921년 5월경 서로 믿고 돕자는 의미로 맞돕회를 조직하고 회장을 맡았다. 맞돕회에서는 야학을 개설하여 한글을 가르치며 문맹퇴치에 앞장섰으며, 지역민의 항일 의식을 고취하기도 하였다. 조직 초창기에는 자신의 집에서 야학을 열었다가 군자동(君子洞) 근처 개인 집을 거쳐 종고산(鐘鼓山) 아래 교회로 옮겼다. 맞돕회는 재정자립도를 높이려고 이발소와 쌀가게도 운영하였다. 그러나 독일로 유학을 떠남에 따라 맞돕회는 여수지방 청년회로 흡수되었다. 독일 베를린대학에 입학하여 인류학과 생물학을 수학하였다. 이후 의과대학에 진학하여 산부인과 전문의로 의학박사가 되어 베를린대학 교수로 재직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나치 당국에 의해 폴란드 바르샤바의 크라쿠프병원장을 지냈다. 이후 괴팅겐대학 병원장으로 있다가 소련군의 점령으로 제2차 세계대전 종전을 맞이하였다. 1950년 미국으로 이주하여 워싱턴병원 산부인과 전문의로 재직하다가 동 병원의 간호사와 결혼하였다. 1977년 60여 명을 수용하는 양로원을 설립하기도 하였다. 1990년 12월 17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다.

수형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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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출판법위반, 보안법위반 경성지방법원의 공판에 부침 경성지방법원 1919-08-30 국가기록원
2 판결문 보안법위반, 출판법위반 징역 10월, 미결구류일수 120일 본형에 산입 경성지방법원 1919-11-06 국가기록원
3 판결문 보안법위반등 공소 기각, 미결구류일수중 60일 본형에 산입 경성복심법원형사부 1920-02-27 국가기록원
4 인물카드 보안법위반, 출판법위반 10월 경성복심법원 1920-02-27 국사편찬위원회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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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대전현충원 대전광역시 유성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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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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