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5권(2003년 발간)
평안북도 강계(江界) 사람이다.
1919년 3월 1일의 독립만세운동과 같은 해 11월 28일의 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했다.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던 김종진은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여기에 참여하여 시가(市街)를 행진하며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그리고 그 해 3월말에 대동단(大同團)이 조직되자 여기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대동단은 전 조선민족의 대단결을 표방하고, 조선의 독립을 목적으로 조직된 단체이다. 1919년 3월 말 대동단 결성을 주도한 전협(全協)·최익환(崔益煥) 등은 그 해 10월 초순경 대동단의 본부를 상해(上海)로 이전할 계획을 세우고, 의친왕(義親王)의 상해(上海) 망명을 추진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3·1독립운동과 같은 대대적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거사 내용과 방법도 3·1독립운동의 방식을 쫓아 진행시켰다.
이때 김종진은 자신의 숙소를 거사 논의 장소로 제공하고, 대동단이 주도한 독립만세운동의 [독립선언서]에 서명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그런데 거사를 준비하던 중 의친왕(義親王)의 상해 망명계획이 일본 경찰에 사전 탐지되고, 그 해 11월 11일 만주 안동역(安東驛)에서 의친왕 일행이 붙잡혀 대동단의 조직은 대부분 파괴되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 경찰의 포위망을 피한 김종진은 나머지 인사들과 함께 독립만세운동 계획을 강행하였다. 그리하여 1919년 11월 28일 김종진을 비롯한 정규식(鄭奎植)·박정선·나창헌(羅昌憲) 등은 종로 안국동(安國洞) 경찰관주재소 앞 광장에서 미리 준비해 온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살포하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 일로 체포된 김종진은 1920년 12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정치범처벌령 및 출판법,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받고 1년여 동안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韓民族獨立運動史資料集(國史編纂委員會) 第5輯 245∼246面
- 崔恩喜全集(조선일보사, 1991) 第2卷 137面
- 朝鮮獨立運動(김정명) 第1卷 분책 230∼232面
- 判決文(京城地方法院, 1920. 12. 7)
- 崔恩喜全集(조선일보사, 1991) 第3卷 130∼133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