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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 5월 16일 경기도 고양군(高陽郡) 한지면(漢芝面) 보광리(普光里)에서 출생했다. 영수(永洙)라는 다른 이름이 있다. 기독교 신자이며, 노동자로 생활하였다. 이후 충남 논산군(論山郡) 두마면(豆磨面) 용동리(龍洞里, 현 계룡시 신도안면 용동리)로 이주하여 생활하였다. 1919년 6월 이순화(李順和), 박기운(朴氣運) 등의 기독교인들과 함께 서울의 4대문에 일본천황에 대한 규탄문을 게시하는 독립운동을 전개한 이래 여러 차례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3월 1일 이래 전국적으로 일제의 식민지배에 반대하고, 조선의 독립을 위한 독립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독립의지가 크게 고양되었다. 나라의 독립에 적극적으로 동의하여, 같은 기독교 신자로서 평소 교류가 깊었던 이순화, 박기운, 이원근(李元根), 전여수(田汝秀), 노원장(盧元長) 등과 시국을 논의하였다. 이 자리에서 이들과 함께 조선의 독립을 위한 독립운동에 참여하여 서울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겠다는 것, 그리고 이와 함께 사람들에게 기독교의 전파도 함께 할 것을 결정하였다.
독립운동의 방식은 서울의 4대문에 한국을 의미하는 팔괘기(八卦旗)와 기독교를 의미하는 십자기를 게양하고 일제 천황을 규탄하는 「방문(榜文)」을 게시하여 찬미가를 부르고 기도를 올리자고 하는 이순화의 방식을 따르기로 결정하였다. 이후 구체적인 준비에 착수하여 6월 28일 서울의 4대문에 세울 깃대를 2본씩 8본을 제작하고, 이원근이 북문, 전여수가 동문, 박기운이 서문을 담당하게 하였고, 이순화와 함께 남대문을 담당하는 것으로 역할을 분담하였다.
다음날인 6월 29일 이순화, 박기운, 이원근, 전여수, 노원장 등과 함께 결의를 다지고, 각자 서울의 4대문으로 향했다. 이순화와 함께 남대문으로 가서 파란색과 흰색 피륙에 십자의 휘장을 그린 복장으로 갈아입었다. 커다란 팔괘기와 십자기를 세우고, 조선의 독립과 기독교를 높이는 벽보를 성벽에 부착하였다.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천하 만민에 고한다. 나는 천인만상(天人萬象)을 창조하고, 각 나라마다 대표자를 정해 두었으나, 그들은 사욕으로 말미암아 분쟁을 일으켜 만국(萬國)의 부패를 초래했다. 따라서 앞으로 팔괘기와 십자기를 게양하고 기도하라’는 내용이었다. 또 일본의 조선 침략과 일제의 천황을 규탄하는 「일본 황제에게 보내는 통문」이란 문서도 부착하였다. 그 후 벽보의 내용과 같이 찬미가를 높이 부르면서 기도하였다.
이와 같은 독특한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중, 이순화와 함께 출동한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1920년 4월 20일 경성지방법원으로부터 「보안법」 위반 및 「불경죄」를 이유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재판 결과에 불복하여 동지들과 함께 항소했으나, 제2심 재판이 열리기 전에 스스로 항소를 취하하였다. 이로써 징역 1년이 확정되어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한 뒤, 충청남도 논산으로 이주하여 생활하였다. 이주한 후에도 기독교 신자로 활동하면서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1938년 3월 17일 기독교인들과 함께 대전(大田)에서 새로운 독립운동을 계획하다가 체포되었다. 이로 인하여 1939년 4월 24일 대전지방법원 강경지청으로부터 「보안법」 위반을 이유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아 또 다시 일제의 감옥에 투옥되어 옥고를 치렀다. 2번째 출옥 후에도 독립운동을 지속하였다. 본인의 집에서 태극기와 독립운동에 관한 책을 보관하고 있다가 1941년 초 일제 경찰에 발각되어 3번째 체포되었다. 이로 인해 이해 3월 24일 대전지방법원 강경지청으로부터 「공안법」 위반을 이유로 벌금 3만원을 선고받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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