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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36647
성명
한자 趙鏞錫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2002 훈격 대통령표창
1919. 3. 5. 서울 경신학교(儆新學校) 3학년에 재학 중 학생 중심의 서울 2차시위운동에 참여하여 남대문역 앞에서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5개월여의 옥고(獄苦)를 치르고 징역 6월 집행유예(執行猶豫) 3년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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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5권(2003년 발간)

경남 함안(咸安) 사람이다.

1919년 3월 5일 서울 남대문역(서울역) 앞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서울 경신학교(儆新學校) 3학년에 재학 중이던 조용석은 오세창(吳世昌)·박주풍(朴疇豊) 등과 함께 학생단의 제2차 만세운동이 있음을 전해 듣고 다른 학생들과 함께 서울역 시위에 참가하였다.

조용석은 학생·군중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태극기를 흔들고 남대문 쪽을 향해 행진하였다. 이때 길 가던 사람들도 이 행렬에 뛰어들어 5천여 명이던 시위군중은 어느덧 만여 명으로 불어났다. 시위행렬이 남대문 안으로 들어서자 경비중이던 일본 경찰에 의해 저지되었다. 그러나 시위군중은 저지선을 뚫고 계속해서 행진하였다. 이때 시위를 주도하였던 강기덕과 김원벽 등 50여 명이 일본 경찰에 붙잡혔지만, 시위행진은 계속되었고 보신각까지 행진을 벌였다. 그러나 더욱 증강된 경찰대가 총칼을 휘두르며 저지하자 시위군중들은 해산하였다. 이 과정에서 많은 학생들이 중상을 입고 조용석을 비롯한 75명이 종로 경찰서로 연행되었다.

그는 이 일로 붙잡혀 5개월 여의 옥고를 치르고 1919년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9卷 186·193面
  • 豫審終結決定書(京城地方法院, 1919. 8. 30)
  • 韓民族獨立運動史資料集(國史編纂委員會) 第11輯 10面
  • 韓民族獨立運動史資料集(國史編纂委員會) 第18輯 256∼268面
  • 判決文(京城地方法院, 1919. 11. 6)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5輯 58∼82·95∼99面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13輯 107·142面
  • 韓民族獨立運動史資料集(國史編纂委員會) 第17輯 26∼27面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조용석 - 경상남도 함안군(咸安郡) 북면(北面) 사촌리(舍村里) -
본문
1896년 4월 26일 경상남도 함안군(咸安郡) 북면(北面) 사촌리(舍村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경신학교(儆新學校) 학생으로 3월 5일 경성의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만세시위 참여 당시 서울 연지동(蓮池洞)에서 거주하였다. 1919년 2월 8일 일본 도쿄(東京)의 한인 유학생들이 주도한 2.8독립선언서 발표 소식이 서울에 전해졌다. 신문기사 등을 통해서 제1차 세계대전 종료에 따른 파리강화회의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소식을 들었던 서울의 전문학교 학생들은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하기로 결심하였다. 학생대표로 경성의학전문학교(京城醫學專門學校)의 김형기(金炯璣)·한위건(韓律健), 보성법률상업전문학교(普成法律商業專門學校) 졸업생 주익(朱翼),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의 김원벽(金元璧),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의 이용설(李容卨)·김문진(金文珍)·김대우(金大羽) 등이 독립선언서 작성 및 만세시위를 기획하였다. 2월 20일 서울 숭동(崇洞) 예배당에서 학생 대표들은 제1회 학생지도자 회의를 개최하였다. 2월 23일경 학생 대표 김원벽은 민족대표 구성원이었던 박희도(朴熙道)에게서 3월 1일에 독립선언서 낭독 및 독립만세시위를 일으킬 계획을 전달받았다. 2월 25일 정동(貞洞) 예배당 구내 이필주(季弼柱) 목사 집에 모인 학생대표는 3월 1일 오후 2시에 탑골공원에서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학생대표들은 지연, 학연 등을 이용해서 전문학교와 중등학교 재학생들에게 3월 1일 만세시위 참여를 독려하였다. 그런데 2월 28일 밤중에 조선총독부 당국은 서울 일대에서 독립선언서를 발견하였다. 2.8 독립선언서 발표 이후 학생들과 민족지도자들을 예의주시하였던 조선총독부는 3월 1일 오전 10시를 전후로 군경을 앞세워서 대대적인 수색을 전개하였다. 급박한 상황 속에서 민족대표 33인은 인사동(仁寺洞) 명월관(明月館)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학생대표들은 3월 1일 오후 2시 30분경에 탑골공원에서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학생들과 군중은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서울 일대를 행진하였다. 이후 학생대표들은 3월 5일 서울에서 제2차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의하였다. 이때 오세창(吳世昌)·박주풍(朴疇豊) 등에게서 제2차 만세시위 계획을 듣고 만세시위에 참여하기로 결의하였다. 3월 5일 남대문역(南大門驛) 일대에서 학생단 대표들이 주도하는 시위에 합류하였다. 5,000여 명이 넘는 시위대의 일원으로 남대문에서 일제 군경과 충돌이 있었으며, 그 과정에서 시위를 주도한 강기덕과 김원벽이 붙잡혔다. 이후에도 학생들과 함께 대한문(大漢門) 앞과 남대문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행진하였다. 3월 5일 서울에서 학생단 주도의 제2차 만세시위에 참여했다는 명목으로 일제 군경에 붙잡혀 재판에 회부되었다.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도움말
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출판법위반, 보안법위반 경성지방법원의 공판에 부침 경성지방법원 1919-08-30 국가기록원
2 판결문 보안법위반 징역 6월, 3년간 집행유예, 미결구류일수 90일 본형에 산입 경성지방법원 1919-11-06 국가기록원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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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대전현충원 대전광역시 유성구
국립묘지 안장자 위치정보 시스템 바로가기

관련 현충시설 정보

도움말
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장소 보신각 3·1독립운동 기념터 서울특별시 종로구
2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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