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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번호 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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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柳濬根
이명 없음 성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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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의병 포상년도 1990 훈격 애국장
1906년 4월 기병 민종식(閔宗植)의병대장 휘하에서 유병장(儒兵將)으로 활동하다 경성(京城) 일군(日軍) 사령부(司令部)로 압송되어 대마도로 유배수형 최익현(崔益鉉)의 유해운반자로 석방(1907. 1. 15)되어 1919. 3. 1운동 후까지 구국운동에 활동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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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권(1986년 발간)

유준근은 면암 최익현(勉菴 崔益鉉)의 문인으로서 충청남도 보령(保寧) 출신이다.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이 늑결되자 세금을 받으러 다니는 관리들에게 "전곡갑병(錢 甲兵)이 모두 저 오랑캐의 것이 되었는데 너희들은 세금을 누구에게 바치려는 것이냐" 고 하며 납세를 거부하여 크게 문제를 일으킨 바 있다. 이처럼 침략자 일제에 대한 적개심이 강한 것으로 주변 일대에서 유명하였다.

1906년 5월 전 판서인 민종식(閔宗植)이 의진을 이끌고 서천(舒川)읍을 거쳐 비인(庇仁)·판교(板橋)를 지나 남포(藍浦)에 이르자 유준근은 민종식을 찾아갔다. 민종식 의진이 4일간 남포에 유진하는 동안 서로 구국전략을 의논하였으며, 민종식의 초청을 받아 병중임에도 불구하고 종군하였다. 이때 일군과 관군이 황제의 명을 빙자하고 의병들의 해산을 종용하여 서로 담판이 있었다. 그러나 적들이 의병진의 담판사절을 가두고 보내지 않았다. 이에 유준근은 적의 진중으로 들어가서 의리로 따져 적의 기개를 꺾고 결박되어 있던 의병 사절을 풀어 함께 되돌아오기도 하였다.

유준근은 종군하여 보령을 지나 결성(結城)에서 하루 밤을 지내고 5월 19일 홍주(洪州)로 진격하여 홍주를 함락시켰다. 입성한 후 부서를 확정하였는데 유준근은 유병장(儒兵將)에 임명되었다. 의진은 수성을 위하여 사방으로 소모활동을 하는 한편 적의 대공세에 임하여 부서를 재편하였다. 이때 유준근은 윤상봉(尹相鳳)·채광묵(蔡光默)·이상두(李相斗)와 함께 참모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적의 공격이 점차 심화되자, 의진은 적의 지속적인 공격에 힘이 진하여 5월 31일 새벽 3시에 성문이 무너지고 크게 패하였다. 이 전투에서 80여 명이 순국하고, 79명이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해 7월에 황제의 특지로 70명이 석방되고, 유준근을 비롯하여 남규진(南奎振)·이식(李侙)·신현두(申鉉斗)·이상구(李相龜)·문석환(文奭煥)·신보균(申輔均)·최상집(崔相集)·안항식(安恒植) 등 9명은 일본의 대마도(對馬島)로 압송되어 억류생활을 하게 되었다. 일본 헌병대에서 갖은 고초를 당할 때 윤석봉과 유준근은 "우리들은 강약(强弱)이 부동하여 잡혔으나 의로써 거병하였던 것이니, 차라리 죽을지언정 일본 음식을 받아먹을 수 없다" 고 하면서 단식하여 의병들의 구국 항일의 기개를 그대로 드러내었다. 특히 유준근의 성품이 강직하여 적들이 꺼려했으므로 남규진·이식·신현두와 함께 무기징역형을 받았다.

이들이 대마도로 유배된지 한 달여 후에 태인(泰仁)·순창(淳昌)에서 의거하다가 체포된 면암 최익현과 돈헌 안병찬(遯軒 安炳瓚)이 유배되어 왔다. 이곳에서 서로 의지하면서 시를 지어 위로하였다. 이때 유준근은 면암의 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시로써 화답하였다. "고국에선 아무도 이 길 와 본 일이 없으니 일변 기쁘고 일변 슬픈 마음을 가눌 길이 없네 다 함께 대의(大義)를 붙들기 위해 조용히 나갔던 것이니 깊은 수치 쾌히 푸른 바다 소리에 씻어나 보세" (故國無人駐此行 不勝一喜一悲情共扶大義從容就 快洗深羞碧海聲) 이들은 대마도에서도 우리 고유의 복색을 변치 말 것을 약속하고, 일본인이 제공하는 음식과 의복을 거절하고 고국에 부탁하여 해결하고자 하였다.

1919년 3·1독립선언과 만세 시위 운동이 일어나자 유준근의 백관형(白觀亨)·송주헌(宋柱憲) 등 10여 명과 함께 서울 수창동(壽昌洞) 여관에 모여 융희황제를 복위시켜 민심을 수렴하고 독립을 성취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고, "강산도 전과 같고 궁실도 전과 같고 인민도 전과 같으니 다시 황제의 위에 좌정하여 일국을 호령하고 각국에 통보하십시오" 라는 내용의 글을 지어 가지고 3월 5일 청량리로 나가 융희황제가 우제(虞祭)에 나가는 도중에 글을 올리다가 일경의 제지를 받았다. 이 일로 체포되어 11월 6일 징역 6월형을 선고받았다.

한편 33인의 독립선언서가 발표되자 유림대표들도 파리강화회의에 서한을 보내자는 운동에 참여하여 서명한 137인중 1인이 되었다. 이때 유준근은 전라남북도를 책임 맡고 간재(艮齋) 전우(田愚)를 방문하여 다음과 같은 말로써 설유하였다. "이번 독립선언이 이미 전 세계를 경악하게 만들었으나 그 선언서에 연서한 사람 중에는 유감스럽지만 우리 유림이 일인도 참가치 못했다는 것은 천고에 있을 수 없는 수치가 아닙니까· 이 치욕을 씻으려면 유림의 중망(重望)을 갖춘 선생이 지도하여 지금 서울에 있는 경향사우(京鄕士友)가 중심 되어 전국을 망라한 대유림단을 조직해서 파리강화회의에 유림단 대표를 파견하여 한국 독립의 국제 승인을 요청하려는 계획이 비밀리에 준비중에 있으므로 선생의 지도를 바라고 내려와 간청합니다" 그러나 간재는 "이제 독립 운동을 전개한 33인이 자칭 민족의 대표라 이들은 모두 이단에 속한 천도교·예수교·경교·불교인만으로 연서되었으니 어찌 우리 민족의 대표로 인정하겠는가· 우리 유림단이 그러한 이교인을 따라 종사하려 함은 도리어 큰 치욕이 될 줄 안다. 우리 유자에게는 오직 國難亡道可亡萬也不昻의 법문이 있으니 마땅히 그 법문을 따라 수사선도(守死善道)할 뿐이오, 독립운동이라는 미명에 빠져 이교인의 뒤를 따라서는 안된다"고 도리어 유준근을 훈계하였다. 이에 유준근은 분개하여 다음과 같이 자신의 독립사상을 전개하였다. "선생이 유림 영수라 하여 안자존대(安自尊大)한 생각을 품어 민족 대표 33인을 오히려 이단이라 배척하고 국가 독립운동에도 참여치 않겠다고 하는 것이야말로 민족의 반역자이며 우리 유림단의 반역자다. 선생의 소위 수사선도(守死善道)는 무엇을 가리켜 하는 말입니까, 국가를 사랑함이란 천리(天理) 당연의 도가 아니고 무엇이며, 독립운동에 몸을 바쳤다면 죽음이 도가 아니고 무엇이며, 국가와 민족을 모르는 도가 과연 유림법문(儒林法門)의 어디에 있으며 70년이나 공맹서(孔孟書)를 읽은 선생이 오히려 공맹법문(孔孟法門)을 버린 죄인이 되려는 것입니까· 선생과 같은 유림이 있어서 우리 나라가 오랑캐의 발아래 난장판이 된 것이 아니오! 오랑캐의 사슬에서 벗어나려는 독립운동을 반대함은 스스로 오랑캐 됨을 감수하라는 것이니 인지무량호불서사(人之無良胡不瑞死)란 옛말이 선생과 같은 기세도명배(欺世盜名輩)를 가리킨 말이 아니겠습니까" 그의 이상의 사상에서 볼 때 전통의 위정척사(衛正斥邪)사상에서 크게 벗어나 공맹의 도보다 민족과 국가를 앞세운 근대적 민족주의로 전향하였음을 알 수 있다.

후에 홍주의진의 활약상과 대마도 유배지에서의 생활 그리고 면암 최익현의 최후에 관하여 문집을 지었는데 그 제목은 「마도일기(馬島日記)」라 하였다. 이 책은 독립운동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매천야록 386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권 356~360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4권 81·82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3권 93·95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권 68·128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3권 96·141면
  • 벽옹김창숙일대기 89~92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8권 923·925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2권 132·133·136·137·150·155·158·177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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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유준근 자: 순경(舜卿), 호: 우록(友鹿), 벽서(碧棲) 충남 보령(保寧) 1906년 홍주의병, 1919년 파리장서운동
본문
1860년 12월 18일 충청남도 보령(保寧) 녹문(鹿門, 현 보령시 대천읍 내항리)에서 생원 유형중(柳馨仲)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자는 순경(舜卿), 호는 우록(友鹿)·벽서(碧棲)이다. 최익현(崔益鉉)의 문인이다.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 체결되자 이에 대한 저항으로 납세를 거부하고 을사오적과 일본의 침략 행위를 공박하였는데 이 일로 붙잡혀 보령관아에 갇혔다가 풀려났다.1906년 5월 전 참판 민종식(閔宗植)이 홍산(鴻山)의 지치(支峙)에서 홍주(洪州)의병을 재기하고 남포(藍浦)에 이르렀을 때, 민종식의 초청을 받고 그 휘하에 들어가 유병장(儒兵將)으로 활동하였다. 홍주의병은 홍주성을 공격하여 일본군을 쫓아내고 5월 20일 홍주성을 점령하였다. 그러자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명령에 따라 일본군수비대가 파견되었다. 일본군 보병 제60연대의 대대장 다나카(田中) 소좌가 인솔하는 보병 2개 중대 약 400명과 기병 반개 소대 그리고 전주수비대 1개 소대가 합세하여 5월 30일 홍주성을 포위 공격하였다. 의병대는 성루에서 대포를 쏘면서 대항했으나, 일본군은 남문과 북문을 폭파하고 성안으로 쳐들어왔다. 시가전이 벌어졌으며, 일본군의 화력에 밀려 수많은 의병들이 희생되었다. 이 전투에서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무기징역을 받았다.남규진(南奎振)·이식(李侙)·신현두(申鉉斗)·이상구(李相龜)·문석환(文奭煥)·신보균(申輔均)·최상집(崔相集)·안항식(安恒植) 등과 함께 일본의 쓰시마(對馬島)로 압송되어 경비대의 수감소에서 유폐생활을 하였다. 수용소에서 일본군은 노역을 시키면서 검은 색 외투를 입게 하였다. 이에 대하여 “우리를 집단적인 노예로 만들려는 것”이라면서 “우리는 한국 사람이므로 한국 옷을 입어야 한다. 그러니 털외투는 입을 수 없다”라고 이를 거부하였다. 이에 대하여 최익현은 “모두가 바람 따라 흔들리는데, 그대만이 옛 의관을 지키네 그려”라고 칭송하였다. 징역 14년으로 감형되었다가 1909년 2월 풀려났다.1910년 ‘경술국치’ 후 아들을 낳고 호적에 올리지 않은 일로 붙잡혔으나 이에 항거하였다. 1914년에는 임병찬(林炳瓚)이 조직한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에 충청도 대표로 참여하였다. 임병찬은 국권반환과 일본군의 철수를 요구하는 장서투서운동을 전개하기로 하고, 1912년 11월 각지에 격문을 발표한 뒤 1914년에 걸쳐 각지의 인사들을 모집하였다. 충남지역은 안병찬(安炳瓚) 등 최익현 문인이거나 홍주의병에 참여했던 인물들이 많이 참여하였다. 그러나 이 거사는 수원군 대표 김창식(金昌植)이 청양(靑陽)에서 체포되어 조직이 발각되어 실행될 수 없었다.1919년 3월 고종의 국장에 참례하기 위해 서울에 올라가 3월 3일 김창숙(金昌淑)을 만나 파리장서(巴里長書)에 서명하고 전라도 지역 연락책임을 맡았다. 또한 서울 수창동의 여관에서 고석진(高石鎭)·송주헌(宋柱憲) 등과 만나 순종 복위 계획을 세웠다. 순종을 복위시켜 민심을 수렴하여 독립을 쟁취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3월 5일 반우제(返虞祭)를 지내고 돌아오는 순종에게 “강산도 전과 같고 궁실도 전과 같고 인민도 전과 같으니 다시 황제의 위에 좌정하여 일국을 호령하고 각국에 통보하십시오”라는 상주문을 올리기로 하고 이를 추진하였다. 상주문은 고석진이 작성하였으며, 순종이 청량리를 지날 때 송주헌이 이를 전달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를 전달하려는 송주헌이 현장에서 일제 헌병에게 붙잡혔다.이 일로 3월 14일에 붙잡혀 종로경찰서에서 심문을 받았으며, 그 해 11월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았다.1920년 8월 5일 사망하였다. 홍주의병장 지산(志山) 김복한(金福漢)은 묘지명을 쓰면서 “백번 꺾어도 휘지 않고 기운이 하늘에 서리고 의백(義魄)이 땅에 있다”면서 “초야에서 일어나 큰 공을 세웠도다”라고 칭송하였다.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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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출판법위반, 보안법위반 경성지방법원의 공판에 부침 경성지방법원 1919-08-30 국가기록원
2 판결문 보안법위반, 출판법위반 징역 6월, 3년간 집행유예, 미결구류일수 120일 본형에 산입 경성지방법원 1919-11-06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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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소재지
국내산재 충청남도 보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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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비석 한국유림 독립운동 파리장서 비 대구광역시 달서구
2 비석 파리장서 비 경상남도 거창군
3 비석 한국유림 독립운동 파리장서 비 서울특별시 중구
4 비석 한국유림 독립운동 파리장서비 전라북도 정읍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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